과학이란 가면 뒤에 숨겨진 야만
과학이란 가면 뒤에 숨겨진 야만
  • 미래한국
  • 승인 2014.01.22 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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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닌 사망 90주기에 부쳐
 

그냥 일종의 ‘믿음’이었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의 붕괴와 공산주의의 도래는 필연이라고 했지만 그것은 증명된 결론이 아니었다. 당연히 법칙이 아니라 가설이요 주장일 뿐이었다. 마르크스주의는 과학이 아니라 단지 ‘과학이라는 믿음’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런 믿음이 그들에겐 중요했다. 과학의 시대였기 때문이다.

혁명을 위해 적국 독일과 손잡다

계몽주의 이래 모든 주의주장들은 설득력을 위해선 무엇보다도 과학적이라는 포장지가 중요했다. 인간은 행복을 위해선 신의 권위라는 억압 아래서 해방돼야 하며 이성과 합리가 정신의 왕좌를 차지해야 한다고 믿어지던 시대였다.

‘과학적’이라는 것은 그 모든 것의 집약적 표상이었다. 마르크스도 그렇게 자신의 주장을 포장했고 그 후예들은 그에 혹했다. 그러나 겉포장을 뜯어내자 안에서 튀어나온 것은 이성과 합리가 아니라 새로운 야만이었다. 그 수제자요 가장 충실한 사도를 자처한 레닌이 바로 그것을 보여줬다.

올 1월 21일, 그 레닌의 사망 90주기다. 1917년 10월 러시아에서 세계 최초로 마르크스주의에 입각한 사회주의 혁명을 성공시켰다. 그러나 그것은 혁명의 성공이라기보다는 권력 탈취의 성공이었다.

차르 체제라는 러시아 구체제의 붕괴는 8개월 전인 2월 혁명으로 이뤄졌다. 레닌은 그 2월 혁명에서 아무 역할을 하지 못했다. 당시 그는 스위스에 머물러 있었으며 4월 16일에야 러시아로 돌아올 수 있었다. 적국 독일의 덕분이었다.

1차 대전 중이었다. 2월 혁명 이후에도 러시아 임시정부는 여전히 독일과 전쟁을 계속하고 있었다. 독일은 러시아를 공략하는 수단의 하나로 혁명을 활용하기로 했다. 혁명이라는 정치적 전염병을 퍼뜨려 내부에서부터 무너지게 하려는 것이었다. 레닌은 그 병균의 하나였다.

독일의 루덴도르프 장군은 독일의 노동조합원과는 접촉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레닌의 안전한 귀국을 주선했다. 귀국한 레닌은 독일의 기대에 훌륭히 부응했다. 귀국 다음날인 4월 17일 레닌은 4월 테제를 발표해 ‘혁명적 패배주의’를 천명했다.

전쟁을 즉각적으로 중단해야 하며 혁명의 성공을 위해선 자국 러시아가 독일과의 전쟁에서 패배해도 좋다는 것이었다. 레닌은 10월 혁명으로 권력을 잡자마자 즉각 독일과 휴전했다. 10월 혁명의 성공은 레닌의 성공일 뿐만 아니라 독일의 성공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은 러시아의 역사로 보면 뼈아픈 실패였다.

독일은 러시아에 대한 ‘혁명화 전략’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결국 패전국이 됐기 때문이다. 10월 혁명이 아니었다면 러시아는 전승국의 일원이 됐을 것임에 틀림없었다. 레닌은 그 기회를 놓치게 했다.

혁명이 더 큰 고통을 가져왔다

물론 러시아 인민이 전쟁으로 크나큰 고통을 겪었으며 10월 혁명으로 적어도 그 고통이 중단된 측면은 있었다. 그러나 10월 이후 새로이 닥쳐온 고통은 그 이전의 고통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레닌은 “토지, 빵, 평화”를 내걸었지만 그 치하의 러시아에는 그 어느 것도 없었다. 농민들은 오히려 토지를 빼앗겼으며 도시에 주어진 것은 빵 대신 식량난이었다.

레닌은 독일과의 전쟁은 중단하면서도 내부에선 계급 간의 전쟁을 일으켰다. 참혹한 테러가 러시아 전역을 휩쓸었다. 그리고 그와 함께 차르 체제 못지않은 아니 그 이상 가는 새로운 유형의 전제정치가 도래했다.

스탈린식 폭압정치는 레닌이 시작

제정 러시아는 비밀경찰 오흐라나(Okhrana)로 악명 높았다. 그것은 구 유럽 전체에서도 가장 큰 것으로 차르 전제정치의 상징과도 같았다. 그러나 10월 혁명 이후 레닌 체제하에서 등장한 ‘全러시아 비상위원회(Cheka)’는 모든 면에서 그것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오흐라나는 가장 규모가 컸을 때도 1만5천명이었는데, 체카는 설립 3년도 안 돼 이미 25만 명의 상근 정보원을 두고 있었다. 활동 양상도 압도적이었다. 차르시대 말기에도 모든 범죄와 관련해 한 해 평균 17명이 처형당했는데, 1918~1919년 체카는 정치범의 경우에만 한 달에 1000명을 처형했다.

오흐라나는 체포는 마음대로 할 수 있었어도, 공판을 위해선 다른 유럽 국가들의 경찰과 마찬가지로 피고를 법정에 넘겨야 했다. 하지만 체카는 비밀리에 소집된 특별 법정을 스스로 관리하고 판결을 내렸다. (폴 존슨 <모던타임스>)

차르 체제가 아무리 악랄했다 하더라도 레닌 체제만큼은 아니었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 좌익들 사이에는 일종의 헛된 신화 하나가 존재한다. 나중의 스탈린이 문제였지 레닌은 훌륭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레닌이 좀 더 오래 살았으면 러시아 혁명이 스탈린에 의해 타락하는 것은 막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안타까워한다. 레닌이 유언장에 “스탈린을 제거할 수단을 찾아보라”고 덧붙였다는 점도 내세운다.

그러나 스탈린을 만든 건 레닌이었다. 스탈린 시대의 모든 폭압정치는 레닌 자신이 시작한 것이었다. 1918년 1월 레닌은 “러시아 땅에서 모든 해충을 없애버리라”는 포고령을 내렸다.

레닌은 그 뒤로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적대 분자들의 처단을 강조했다. 스탈린은 레닌이 죽은 뒤에도 그것을 충실히 수행했다. 스탈린은 자신이 시종일관 주장한대로 ‘성실한’ 레닌주의자였다.

1904년 트로츠키는 레닌을 로베스피에르라고 비난했다. 그는 레닌이 당 지도부를 프랑스 혁명 당시의 공안위원회처럼 바꾸려는 테러리스트 독재자라고 했다.

그 말이 맞았다. 레닌은 1917년 이후 정확히 그렇게 했다. 이때는 트로츠키도 레닌에 충실했지만 그는 과거 자신의 통찰을 잊지 않았어야 했다. 프랑스 혁명이 공포정치로 그 주역들을 차례로 집어삼켰듯이 러시아에서도 그 운명은 반복될 것이며 자신에게도 곧 엄습할 것이었기 때문이다.

타고난 인간성에서 비롯된 문제였을까? 타고난 괴물이 있을지도 모른다. 거의 사이코패스를 연상케 하는 스탈린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적어도 정치적 행동에서 중요한 결정 요인은 생물학적 DNA가 아니라 이념적 DNA다.

어떤 타고난 기질도 그것을 합리화시키고 기꺼이 발현되도록 하는 이념과 만나지 않으면 그렇게 나타나지는 않는다. 레닌은 자신의 동지들을 개인이 아닌 사상을 담는 그릇으로 봤다. 레닌의 이 같은 관점은 다른 누구에 앞서 자기 자신에 대해서 완전히 옳았다. 레닌이라는 인간의 머릿속의 악령, 즉 마르크스주의라는 사상이 문제의 핵심이었다.

휴머니즘에 도사린 독소

마르크스주의는 계몽주의 이래의 휴머니즘의 전통에 입각해 있다. 사람들은 특히 한국에선 휴머니즘이라고 하면 거의 대부분 좋은 의미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휴머니즘은, 그에 대해 굳은 확신을 가진 사람들은 전혀 동의하지 않겠지만, 바람직한 측면만을 가진 것이 결코 아니다.

휴머니즘 즉 인본주의(人本主義)는 말 그대로 신본주의(神本主義)의 반대라는 의미를 함축한다. 어느 정도는 종교를 인정하는 휴머니즘도 있지만 그 경우에도 평가의 기준은 ‘인간 중심’이다. 에리히 프롬은 종교도 만일 휴머니즘적이기만 하면 좋은 힘이 될 수 있지만 경직된 종교는 인간에게 해롭다고 했다.

그 같은 종교에서는 인간 내부의 ‘선하고 합리적인’ 모든 것이 인간 외부의 신에게 투사되고, 인간에게는 다만 죄의식과 무력감만 남게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프롬이 놓친 게 있다. 인간의 내부에는 그러한 선한 것 못지않게 아니 그 이상으로 ‘악하고 비합리적인’ 요소가 강력하게 존재할 수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휴머니즘은 과도해지면 인간 내부의 ‘악하고 비합리적인’ 모든 것을 인간 외부의 어떤 것에 투사하게 만들고, 죄와 무기력을 오직 외부의 탓으로 돌리게 만든다. 인간 자신을 선한 존재로 간주하는 대신 그가 살아가는 세계를 악한 것으로 여기게 만드는 것이다.

쉽게 말해 ‘남 탓’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사회구조 탓, 지배계급의 탓 등이 다 그런 것에 해당한다. 프롬은 “루터는 인간을 교회의 권위로부터 해방시키기는 했지만, 인간을 다시금 더 억압적인 권위 아래, 즉 구원의 필수 조건으로 인간의 철저한 복종과 자기 소멸을 강요하는 신의 권위 아래 예속시켰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휴머니즘은 인간을 신의 권위로부터 벗어나게는 했지만, 인간을 다시금 더 직접적인 억압 아래, 즉 구원의 필수 조건으로 또 다른 복종을 강요하는 세속 리바이어던의 권력 아래 예속시키는 위험을 피하지 못했다.

레닌의 혁명은 결국 그런 것이었다. 천상에서 풀려났다고 좋아하다가 지상의 억압 아래로 끌려 들어갔을 뿐이었다. 그리고 해방의 환상을 위해 신이 아닌 인간에 대한 새로운 굴종, 즉 혁명의 수령에 대한 숭배를 대가로 지불해야 했다. 레닌 이래 그를 흉내 낸 모든 혁명이 그랬다.

메두사로 변한 프로메테우스

프로메테우스는 신에게서 불을 훔쳐 인간에게 전해 주려다 독수리에게 영원히 간을 쪼이는 형벌을 받게 됐다. 그래서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을 위해 신에 도전하는 휴머니즘의 상징이 됐다. 마르크스는 그런 프로메테우스이고자 했으며 그 뒤를 수많은 또 다른 지망생들이 줄을 이었다. 말과 글로만 떠들고 있을 때의 프로메테우스들은 어떤 의미에선 낭만적 비장미를 풍겼다.

그러나 사슬에서 풀려나 무기를 손에 쥐게 된 프로메테우스는 더 이상 낭만적 존재가 아니었다. 그것은 이제 메두사였다. 레닌이 그랬다. 그는 사슬을 끊고 차르라는 독수리를 물리치고 나자 러시아의 모든 것을 메두사처럼 화석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19세기 무렵 절정의 성취를 이뤘던 러시아 문학, 더 이상은 없었다. 주기율표의 멘델레예프, 음악의 차이코프스키와 같은 인물도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비스마르크는 농업 생산력과 풍부한 자원을 함께 갖춘 러시아는 산업 발전이 시작되기만 하면 유럽 최강국이 되리라 예견했다. 그러나 레닌의 혁명은 러시아에 그런 발전을 결코 가져다주지 못했다. 단지 메두사 뱀 머리카락의 수많은 눈들 같은 감시기관에 의존해 허상의 제국을 지탱했을 뿐이었다.

메두사를 제압하기 위해선 그 목을 쳐야 했다. 사회주의가 무너지면서 레닌의 동상이 메두사의 목이 잘리듯 도처에서 쓰러졌다. 그러나 이 땅에선 목 잘린 메두사의 대가리가 아직도 위력을 발휘한다. 혁명 놀음의 망상에 취한 자들이 여전히 도처다. 이번에는 메두사의 목을 파묻어야 하는 것인가?

이강호 편집위원·역사비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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