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산가족 상봉의 ‘비인도적’ 이야기
이산가족 상봉의 ‘비인도적’ 이야기
  • 이원우
  • 승인 2014.04.21 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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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적 부작용 적지 않아 … 北은 감시 더 심해져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 그리웠던 30년 세월 / 의지할 곳 없는 이 몸 / 서러워하며 그 얼마나 울었던 가요 / 우리 형제 이제라도 다시 만나서 / 못 다한 정 나누는데 / 어머님, 아버님, 그 어디에 계십니까 / 목 메이게 불러봅니다….”

가수 설운도의 데뷔곡 ‘잃어버린 30년’의 노랫말이다. 1983년 발표된 이 노래는 6·25 정전 30년 만에 성사된 KBS ‘일천만 이산가족 상봉 캠페인’과 맞물리면서 온 나라를 눈물바다로 만들었다. 북한은 이 행사에 참여하기는커녕 10월 9일 아웅산 묘역 테러사건을 일으켰지만 대략 1만 명의 남한 이산가족들이 잃어버린 가족을 찾았다.
그 뒤로 다시 30년이 흘렀다. 신인가수 설운도는 중견가수가 됐다. 1983년에 태어난 아이들은 이제 서른둘이다. 대통령은 전두환에서 노태우로, 김영삼으로, 김대중과 노무현으로, 이명박에서 박근혜로 바뀌었다.

남한은 어마어마한 경제성장을 이뤘다. 그래서일까. 요즘엔 남북분단과 관련된 얘기를 너무 많이 꺼내면 ‘촌스러운 사람’ 취급을 당하고 만다. 본질적인 상황이 1953년의 정전(停戰)에서 하나도 변한 게 없다는 점을 지적하는 사람은 적다.

1983년 상봉행사에 심드렁했던 북한은 2000년 6월 15일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의 남북정상회담 이후 자세를 바꿨다. 순식간에 평화무드가 조성되면서 8월 15일 역사적인 제1차 이산가족 상봉으로 이어진 것이다. 이 행사는 노무현 대통령이 취임한 2003년 2월 25일까지 총 여섯 차례 진행됐다. 바통을 이어받은 참여정부는 2003년 7차부터 2006년 14차까지 총 여덟 차례나 이산가족 상봉행사를 진행했다. 2005년 8월 15일부터는 화상 상봉도 진행했다.

이산가족 상봉의 역사

남북 간 해빙 무드가 일순간에 얼어붙은 계기는 2006년 10월 9일 북한의 1차 핵실험이었다. 이로 인해 활발하게 진행되던 상봉행사도 잠시 주춤한다. 그러나 참여정부는 2007년 5월, 15차 이산가족 상봉을 진행했다. 두 번째 남북정상회담이 진행된 직후엔 16차 행사가 진행됐고 정권은 이명박 대통령에게로 넘어갔다.

MB정권 출범과 박왕자 사건이 있었던 2008년은 이산가족 상봉이 시작된 2000년 이후 처음으로 행사를 갖지 못한 해였다. 2009년 9월 26일 17차 이산가족 상봉행사를 재개하긴 했지만 빈도는 줄었다. 2009년에 한 번, 2010년에 한 번이 있었고 2011~2013년에는 행사를 갖지 않다가 박근혜 정권 출범 1년 만인 지난 2월 19차 행사를 가졌다.

좌파 정권이 집권했을 때 이산가족 상봉행사가 보다 자주 추진되는 것은 통계적으로 사실이다. 이에 대해 많은 사람들은 안타까움을 표한다. 이산가족 상봉이 정치적 현실에 따라 불확실하게 진행돼서는 안 된다는 견해다. 이용자들이 직접 내용을 입력하는 위키백과가 ‘이산가족’ 항목을 어떻게 쓰고 있는지를 보자.

“인도주의적이고 매우 휴머니즘적인 이슈임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이해관계와 논리로 인해 함께 있어야 할 가족들이 60년 이상이나 떨어져 있다.”

이 논리는 종종 우파 정권에 대한 공격의 빌미가 된다. 이제 살아갈 날이 그리 오래 남지 않은 어르신들이 정치적 현실 때문에 가슴 졸이며 인도주의적인 이산가족 상봉마저 하지 못한다는 논리다.
우리가 던져볼 수 있는 질문은 다음과 같다. 이산가족 상봉은 100% 인도적인 문제이기만 할까.

 

상봉자 8.7% “만나지 않는 게 나을 뻔했다”

이산가족 상봉 행사의 실무를 담당하고 있는 대한적십자사 남북교류팀은 최근 흥미로운 설문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이산가족을 상봉하고 돌아온 어르신들이 10명 중 3명꼴로 일상생활의 어려움을 느낀다는 내용이었다.

조사는 전화면접 방식으로 실시됐다. 이산가족 상봉자 230명(방문단 62명/상봉단 168명)에 대해 상봉 이후 건강 및 심리상태를 조사한 결과 약 30%가 그리움으로 인한 생활의 어려움을 호소했다.

상봉 후 생활에 불편한 점이 있느냐는 질문에 ‘있다’고 대답한 인원은 87명이었다. 불편함을 느끼는 이유로는 ‘상봉 후 그리움으로 불면증을 느낀다’고 응답한 사람이 24명(10.4%), ‘북에 있는 가족 걱정에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는 응답이 26명(10.4%), ‘일상에 복귀하기 힘들다’ 17명(7.4%), ‘북의 가족사진만 보게 된다’ 14명(6.1%) 등이었다. ‘꿈에서도 나타난다’는 응답자 역시 6명에 달했다.

상봉 후 힘든 점을 묻는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한 인원은 122명이었다. 힘든 이유로는 ‘가족을 다시 볼 수 없어서’ 63명(27%), ‘생각과 이념의 차이에서 오는 북한 가족에 대한 실망’ 20명(8.7%), ‘북한 가족을 도울 수 없어 무력감을 느낀다’ 15명(6.5%), ‘상봉 이후 체력 소모로 인한 건강악화’ 14명(6%) 등이 꼽혔다.

상봉 행사에서 북한 가족을 만난 이후 심정을 묻는 질문에는 127명이 ‘기쁨이 여전하다’(55.2%), 30명은 ‘다시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이 있다’(13%)고 응답했지만 83명은 ‘지금은 답답하고 허탈하다’(36.1%), 20명은 ‘차라리 만나지 않는 것이 나을 뻔했다’(8.7%)고 대답했다.

대한적십자사는 이번 설문조사에서 심리사회적 지지를 원하는 49명에 대해 4월 초부터 적십자봉사원, 심리사회적지지 강사, 직원들이 직접 가정을 방문해 심리적 응급처치 활동 등 대상자에 맞는 심리사회적지지를 전개한다. 유중근 대한적십자사 총재는 “60여년 만에 다시 가족을 상봉했지만 상봉행사 후 다시는 가족을 볼 수 없다는 생각에 상실감이나 무력감을 느끼는 고령 이산가족이 많았다”며 “이산가족상봉 정례화 등 근본적인 해결과 더불어 상봉 가족에 대한 심리적 강화 활동을 강화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장춘 할아버지가 중국 브로커를 통해 받은 동생의 사진들

“시간이 너무 짧아 … 2시간이 훌쩍 가더라고”

본지는 이번 19차 상봉행사에서 62년 만에 북녘에 있는 동생들을 만난 장춘 할아버지(82)를 심층 인터뷰 했다. 북한군 소위로 임 관해 1951년 9월 강원도 양구 전투에 참여했던 할아버지는 ‘살아야겠다는 일념’으로 부대를 이탈해 연합군에 투항했다. 3년간의 포로수용소 생활을 마친 뒤부터 북에 두고 온 동생들을 그리워하는 이산가족 생활이 시작됐다.

세살 터울의 동생 장동춘 씨는 수 년 전 세상을 떴지만 장 할아버지는 이번 19차 행사를 통해 여동생 장금순 씨(76)와 남동생 장화춘 씨(73)를 만날 수 있었다. 총 행사는 2박 3일의 일정으로 진행되지만 실질적으로 북한의 가족들을 만날 수 있는 시간은 총 여섯 시간 남짓에 지나지 않았다.

- 62년을 기다리셨는데 여섯 시간은 너무 짧지 않으셨는지요.

“너무 짧지. 막상 가기 전에는 알고 싶은 게 무척이나 많았는데…. 막상 보니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우물쭈물 하는 사이에 시간이 다 가더라고.”

- 그래도 동생들 만나니까 좋지 않으셨어요?

“그거야 당연히 그렇지. 원래 작년 8월에 가려던 게 무산되는 바람에 내 팔자에는 아주 못 보는 줄 알았거든. 그래도 어떻게 이렇게 만나게 돼서…. 내 나이로서는 마지막 만남으로 생각합니다. 아직도 못 만나신 분들이 많으니 이제 기회가 다른 분들께 많이 생겨야겠지.”

- 다녀오신 뒤에 너무 우울하시다거나 그렇진 않으셨어요?

“왜 안 그렇겠어. 마음이 우울하지…. 북한 관련된 뉴스만 나오면 한 귀로 듣고 흘려버리면 되는데… 그게 잘 안 되고 아무래도 힘들어. 한 1주일 정도는 눈에 (동생들 만났던) 장면이 자꾸 떠오르고 그래…. 이젠 그래도 시간이 좀 흐르니까 많이 나아졌어요. 대통령께서 힘을 이렇게 써 주셔서 정말 감사하게 생각을 합니다.”

장춘 할아버지(채널A보도화면)

이산가족 상봉은 ‘인도적 문제’이기만 할까

그래도 남한의 사정은 나은 편이다. 어르신들의 괴로움을 조금이나마 달래줄 수 있는 풍요로운 자원이 있고, 이제는 대한적십자사의 심리치료까지 가세하니 말이다.

같은 시간 북한에선 어떤 일이 일어날까. 북측 이산가족 상봉 대상자들이 이른바 ‘남쪽물 빼기’ 작업을 해야 한다는 것은 꽤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들은 각자의 집으로 바로 돌아가지 못하고 평양 등지에 약 보름간 머물면서 사상적인 총화와 검열을 받아야 한다.

이 기간에 진행되는 평양 시내관광 등은 이들의 사상 동요나 특이사항을 찾아내기 위한 빌미라는 것이 다수 탈북자들의 지적이다. 남측 가족들에게 받은 선물이나 현금이 통일전선부 간부들에게 상납되는 경우도 흔하게 증언된다.

집으로 돌아간 이후에도 당국의 시선은 따갑다. 통상 이산가족 상봉 행사가 끝나고 나면 감시가 더 강화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북한 전문매체 데일리NK는 “남쪽 가족을 만나고 온 사람들은 어떤 이야기를 하는지, 상봉 전후의 식생활과 옷이 어떻게 바뀌는지 등을 철저히 감시 받는다. 감시 임무를 받은 해당 주민이 상봉가족과 친하게 지내면서 사상 상태를 감시해 보위지도원에 보고하는 것”이라고 보도한 바 있다.

결국 이산가족 상봉의 인도성은 실질적인 상봉이 이뤄지기 직전까지만 유효하다고 볼 수 있다. 상봉이 이뤄지는 그 순간부터 ‘비인도적 내리막’이 시작된다.

남측 가족들은 정서적인 충격에 마주해야만 한다. 고령의 어르신들에게는 ‘실질적’이라고 봐도 무방한 충격이다. 이제 한 번 만났으니 다시는 만날 수 없을 것이라는 이 감정을 인도적인 것으로 볼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북측의 경우는 보다 더 현실적인 충격, 그러니까 본인들에 대한 감시가 강화되는 불편함에 직면해야만 한다. 모든 사람들이 화려하고 극적인 만남을 생각하며 박수를 칠 때 현실은 이처럼 비정하게 돌아가고 있다.

이원우 기자 m_bishop@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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