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예로운 자결, 추신구(忠臣藏)라
명예로운 자결, 추신구(忠臣藏)라
  • 한정석 편집위원
  • 승인 2015.05.27 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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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석의 역사파일]

사무라이들에게 죽음은 절망이 아니라 자기 구원

인간은 좌절한다. 좌절은 절망으로 이어지고, 인간은 결국 그 절망에 의해 죽음에 이른다. 덴마크 실존주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그래서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했다.

자살로 생을 마감한 성완종 경남기업 회장도 절망했을 것이다. 절망은 고독을 불러오고,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고립감을 가져온다. 죽음은 인간의 고립과 친숙하다.

나 하나로 끝나면 모든 것이 평안해진다는 생각은 극단적 결심을 불러온다. 하지만 성완종 회장의 절망은 의외였다.

그의 절망은 파랗게 타오르는 복수심의 불길을 피워 올렸다. 8명의 권력 실세들의 이름이 그의 돈 로비와 연계되어 등장했고, 성 회장은 저승사자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의 죽음 이후 거액의 회삿돈이 여야 정치인들에 살포된 정황들이 등장했다. 그런 비리를 척결해야 할 총리는 로비의 대상이 되었다는 증언이 나와 최단기 수명의 총리로 기록됐다. 성완종 회장은 혼자 떠나기에는 너무나 억울했던 모양이다.

역사 속에 자살 사건은 너무나 많다. 그런데 자살을 처벌로 삼은 나라도 있었으니 바로 막부(幕府) 시절의 일본이었다.

이제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일본 사무라이들의 어떤 할복 이야기 추신구라(忠臣藏)다.

에도 시대(1702), 46명의 사무라이들은 자신들의 영주가 조정으로부터 명(命) 받은 억울한 죽음에 복수하고 전원 할복으로 생을 마감했다. 추신구라는 일본인들이라면 모두 아는 유명한 이야기다.

추신구라는 일본 무사도(武士道)의 전통이 되었고 이후 46명, 사무라이들의 죽음을 동정한 다이묘들이 피비린내 나는 막부 시대를 끝내고 천황 중심으로 돌아가는 존왕양이(尊王攘夷), 메이지유신의 계기가 된다.

그리고 일본 군국주의의 바탕이 되었다. 그들의 죽음이 도대체 어떠했기에 일본의 역사가 움직였던 것일까. 당시의 상황으로 돌아가 보자.


主君을 위한 사무라이들의 복수 

1702년 3월, 지금의 고베(神戶) 지역인 아코 번(赤穗藩)의 영주인 아사노 나가노리(淺野長矩)는 도쿠가와 막부의 근거지인 에도 성에서 천황이 보내오는 사절을 맞이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그런데 그의 상관 키라 요시히사(吉良義央)는 아사노를 평소에도 무시하거나, 종종 다른 영주들의 면전에서 핀잔을 주곤 했다.

그날도 상관 키라는 조정의 사신을 대하는 격식에 대해 아사노를 나무랐고, 이에 격분한 아사노는 조정의 사신이 근처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칼을 휘둘러 키라 요시히사를 다치게 했다.

쇼군이 집무하는 에도 성에서 칼을 휘둘렀다는 것, 그것도 상관을 다치게 했으니 이는 보통 일이 아니었다. 이에 당시 쇼군이었던 도쿠가와 츠나요시는 아사노에게 자결을 명했다.

아사노는 할복했고, 주인을 잃은 휘하의 무사들은 낭인으로 떨어져 뿔뿔이 흩어졌다. 그러나 낭인으로 전락한 무사들은 주군의 억울한 죽음에 복수의 칼날을 갈았다. 그들은 키라의 자택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주군 아사노의 미망인으로부터 받은 자금으로 각종 무기를 사들여 복수를 계획했다.

1년 뒤인 1702년 12월 14일 밤, 낭인 46명이 키라 요시히사의 저택을 습격했다. 주군의 복수를 한다는 명분으로 그들은 저택의 남녀노소를 닥치는 대로 베어 죽였다.

키라는 사로잡혔고, 할복하라는 요구를 거절하자 그들은 키라의 목을 잘라 주군 아사노의 묘지에 가져갔다.

▲ 메이지 시절의 사무라이들. 이들은 주군의 명예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치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했다.

46명의 사무라이들은 눈발이 흩날리는 주군의 제단에 원수의 머리를 바치고 엎드려 흐느껴 울었다.

자신들의 운명은 결정되어 있었다. 이들은 자수했고, 막부는 할복 명령을 내렸으며, 46명은 모두 할복 자결하여 센카쿠지에 묻히게 된다.

이들의 죽음은 영주들과 백성들의 동정을 샀다. 동시에 인간적 약점을 가진 쇼군의 막부정치를 끝내고 모두가 천황을 받드는 통일된 질서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그것이 일본 근대화의 시작인 메이지유신의 서곡(序曲)이 된다.

1942년 태평양전쟁의 와중에 일본 군국주의 정부는 이 추신구라를 국민 계몽영화로 제작했다.

감독은 미조구치 겐지(溝口健二). 하지만 그는 액션이 아니라, 페미니즘에 집착한 탐미주의 예술영화 감독이었다.

미조구치 겐지는 추신구라를 칼싸움 장면 하나 등장하지 않는 사무라이 영화로 만들었으나, 그 결과는 놀라웠다.

마치 일본 전통 회화를 감상하는 듯한 회화적 장면 속에서 영화는 웅장하고 비장했으며 숭고하기 까지 했다.

영화 속에서 할복을 기다리는 46명의 사무라이들은 비탄이 아니라 환희 속에 있었다. 그들은 할복 준비를 하는 동안 서로 한 명씩 장기자랑을 하거나 노래를 불렀다.

그러면서 웃고 즐거워했다. 죽음은 절망이 아니라 이들에게는 자기 구원이었던 것이다.

사무라이들의 할복 스토리를 탐미적으로 그려낸 미조구치 겐지는 추신구라로 세계 영화사의 굵직한 한 획을 그었다.

영화는 나른한 오후에 한 명씩 할복을 명하는 소리와 기쁜 마음으로 할복장으로 걸어 나가는 사무라이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끝난다.


武士의 道, 어떻게 죽을 것인가 

추신구라의 사무라이들에게 절망은 성완종 회장의 그것과는 달리, 죽음에 이르는 병이 아니었다.

성완종 회장이 절망으로부터 도피하는 자살을 택했다면, 46명의 사무라이들은 그 절망에 대결함으로써 자기 구원을 택했다.

일체의 희망을 버리고 절망과 맞섬으로써 자신들의 명예를 지켰던 것이다. 깨끗하게, 그리고 정연하게….

그러한 최후의 순간은 사람들에게 커다란 깨우침을 줬다. 의리란 무엇인가, 가문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무사(武士)의 도(道)란 무엇인가…. 46명의 사무라이들은 자신들이 훗날 어떻게 기억될 것인가를 생각했던 것이다.

미국의 문화인류학자 루스 베네딕트는 그의 대표적인 저서 ‘국화와 칼(菊と刀)’에서 일본의 문화에는 수치와 함께 세켄테이, 즉 세상 사람들의 눈에 자신이 어떻게 보이는가를 중시하는 일본인의 정신 구조를 발견했다.

일본인은 죄를 범하는 자체보다 그것으로 명예를 더럽히는 것을 더 두려워한다는 것이다.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문제는 결국, 어떻게 죽을 것인가로 그 답을 얻게 된다.

자신의 죽음 이후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기억해 줄 것인가를 생각해 본 사람은 많지 않다. 그렇다면 우리는 의미 없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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