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이승만은 나의 조국을 등질 비겁자가 아니오”②
“나, 이승만은 나의 조국을 등질 비겁자가 아니오”②
  • 김용삼 미래한국 편집장
  • 승인 2015.09.24 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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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말특집] 대한민국을 구한 낙동강 방어전·인천상륙작전-처절했던 낙동강 방어전 에피소드

“경주를 무덤 삼아 전원 옥쇄하라”(정일권) 

9월 8일, 대구 방어의 전략적 요충지인 영천을 인민군에게 빼앗기자 미 8군 사령관 워커 장군은 정일권 육군참모총장에게 “한국군 중에서 가장 믿을 수 있고 잘 싸우는 2개 사단과 각계각층의 민간인 10만 명을 극비리에 선정해 달라. 반공단체의 지도층 및 경찰 간부들을 민간인 리스트에 포함시켜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워커 장군은 데이비슨 라인으로의 전면 철수 명령을 준비해놓고 있었다. 영천이 점령되었으니 대구가 적의 수중에 떨어질 것이고, 이렇게 되면 미군은 한국을 떠나게 될 것인데, 이 때 한국군 2개 사단과 선발된 민간인 10만 명을 제주도나 하와이, 괌 등지로 이송시켜 망명정부를 세우기 위한 계획이었다. 

정일권 장군이 이 내용을 보고하자 이 대통령은 “워커 그 사람 역전의 맹장이라고 듣고 있는데, 보기보다는 여간 겁쟁이가 아니구먼” 하며 실망의 빛을 감추지 못했다. 

“그래, 2개 사단과 10만 민간인을 하와이에라도 데려가겠다는 것인가. 평생 동안 고국을 떠나서 일본 제국주의와 싸운 나더러 이제는 겨레를 이끌고 다시 고국을 떠나라 할 참이었던가….” 

이 대통령은 격노하여 말했다. 

“정 장군! 워커 장군에게 말하시오. 나, 대한민국 대통령은 누가 가자고 해서 나의 조국을 등질 비겁자가 아니라고 말하시오. 나, 이승만은 공산군이 여기 부산에 오면 내가 먼저 앞장서 싸울 것이오. 그래서 내 침실 머리맡에는 언제나 권총이 준비돼 있다고 말하시오. 가려거든 가라고 하시오. 미군들은 왜 여기에 왔는가. 공산 침략군을 물리치고 정의와 자유를 지키자고 온 것 아닌가. 그런데도 좀 위태롭다 해서 가고 싶다면 자기들끼리만 떠나라고 하시오!”

그 무렵 영천을 점령한 인민군은 경주 쪽으로 진격 방향을 틀었다. 이를 미리 예측한 유재흥 군단장은 경주로 넘어가는 길목에 5개 연대를 매복시켜 놓고 적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9월 10일부터 13일까지 사흘 간 국군은 전사(戰史)에 길이 남을 ‘영천 섬멸전’을 전개했다. 

이 전투에서 인민군은 시체 3799구, 포로 309명 등 투입된 병력 거의 전부가 사살되거나 부상을 당하는 궤멸적인 타격을 입었다. 우리 국군의 피해는 전사 29명, 부상 148명, 실종 48명 등 경미했다. 영천 섬멸전의 대승으로 미군의 데이비슨 라인으로의 철수는 취소됐다. 

영천 섬멸전이 시작되기 전날인 9월 9일에는 경주 지역 방어선이 적의 대공세로 인해 위태롭게 됐다. 정일권 참모총장은 수도사단 18연대(일명 백골부대)의 임충식 연대장(후에 합참의장, 국방부 장관 역임)에게 다음과 같은 훈령을 보냈다. 

백골부대의 장엄한 전투

“대한민국의 명운은 오직 백골부대 여러분의 용전에 달려 있다. 여러분의 백골로서 경주를 사수하라. 본직(本職)은 여러분의 분발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감히 말하노니, 여러분은 경주를 무덤으로 삼아 전원 옥쇄하라!” 

수도사단 18연대는 서북청년단원들이 사단 예하 18연대에 자진 입대하면서 죽어 백골이 되어서라도 고향땅을 되찾겠다는 뜻으로 철모에 백골을 그려 넣은 데서 부대 이름이 유래되었다고 전해진다.

연대장 이하 전원이 흰 해골이 그려진 철모를 쓰고 다녀 백골부대라는 명칭으로 불렸는데, 전투를 했다 하면 승리하여 인민군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전공이 뛰어나 부대원 전원이 두 번이나 일 계급 특진을 했다. 이처럼 긍지 높은 연대에 육군참모총장이 옥쇄를 명하자 임충식 연대장은 대원들에게 이렇게 훈시했다. 

“우리 연대의 영예 높은 백골정신을 유감없이 발휘할 때가 왔다. 참모총장 각하의 각별하신 격려의 뜻을 받들어 연대장은 진두에 서서 경주를 사수할 것이다. 이 연대장이 진두에서 조금이라도 물러서면, 누구라도 좋다. 이 연대장을 쏴 죽여주기 바란다. 그리고 이 연대장의 시체를 방패삼아 최후의 일병까지 싸워주기 바란다. 그 대신, 너희들 중에 우리 백골정신을 더럽히는 자가 있을 때엔 이 연대장이 가차 없이 처벌할 것이다.” 

연대 장병들은 일제히 “백골! 백골! 백골!”을 삼창하고 ‘결사(決死)’ 두 글자를 백골 철모에 동여매고 경주를 지켜냈다. 뿐만 아니라 지원 나온 미군 19연대와 협동 작전을 펼쳐 안강-기계를 탈환하고, 인민군 12사단을 역포위하여 섬멸했다. 백골부대는 1950년 10월 1일 수도사단 예하 23연대 3대대 10중대가 38선을 전군 최초로 돌파했으며, 이날을 기념하여 국군의 날이 제정되었다. 

“남한에 무기만 갖고 가면 공짜로 혁명이 이룩된다”(김일성) 

인민군이 낙동강 전선에서 버티기 힘들었던 이유는 보급 때문이었다. 남로당 간부 출신 박갑동은 인민군의 보급이 형편없었던 이유를 자신의 저서(<한국전쟁과 김일성>,도서출판 바람과 물결)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다. 

‘인민군의 최대 약점은 보급부대가 없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러시아 혁명 내전시대에 적군(赤軍)이 식량을 전적으로 혁명을 지지하는 민중에 의존하여 번잡한 수송을 하지 않고 기민하게 부대 이동을 한 점을 모방한 것으로 보인다…. 인민군은 각지에 인민위원회라는 것을 조직하여 식량을 조달시켰다.

인민군은 농민에게 “토지를 공짜로 줄 테니까 식량을 내라”고 했다.… “남한에 무기만 갖고 가면 모든 것이 공짜로 혁명이 이룩된다”는 식의 약탈적인 김일성의 생각은 남한 인민에게 커다란 곤란을 주었고, 두 번 다시 김일성의 통치하에는 들어가지 않겠다는 강한 혐오감만을 남겼다.’ 

▲ 마거릿 히긴스 기자

‘한국전의 영웅’ 마거릿 히긴스 기자 

낙동강 방어전을 전 세계에 알리는 데 결정적으로 공헌한 인물은 뉴욕 헤럴드 트리뷴 지 소속의 여성 종군기자 마거릿 히긴스였다. 그녀는 전쟁 발발 이틀 만인 1950년 6월 27일 김포에 도착해 한강교 폭파, 서울 함락, 맥아더 장군의 한강 방어선 시찰, 스미스 특수임무대대의 오산 전투를 취재한 것을 필두로 미군 전투복과 군모를 쓰고 미군들과 함께 생사가 오락가락하는 전선을 누비고 다녔다. 

덕분에 그녀는 미군 장병들로부터 ‘드레스보다 군복이 더 어울리는 여자’, ‘화장품 대신 진흙을 바른 여자’라는 평을 들었다. 낙동강 방어전이 벌어지자 히긴스 기자는 마이켈리스 대령이 지휘하는 미 27보병연대를 종군 취재하면서 지옥과 같은 전투 현장을 생생하게 미국 독자들에게 전했다. 

그녀는 취재뿐만 아니라 부상병 후송은 물론, 자기 피를 뽑아 환자들에게 수혈을 해 주는가 하면, 위생병에게 지혈법 같은 응급처치 기술을 배워 부상병들을 돌봤다. 27연대장 마이켈리스 대령은 히긴스 기자의 소속사였던 뉴욕 헤럴드 트리뷴 지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독자 투고를 보냈다. 

“낙동강 전선에서 싸우는 우리 연대의 전투를 보도한 히긴스 기자의 기사에는 중요한 게 한 가지 빠졌다. 그녀는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부상병들에게 수혈을 해주었다. 그녀의 헌신적인 노력이 없었으면 많은 병사들이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히긴스 기자의 그날 행동은 가히 영웅적이었다.” 

히긴스 기자는 한국 해병대의 마산 진동리와 통영 상륙작전도 종군 취재를 했는데, 전투가 끝난 후 ‘귀신 잡는 해병’이라는 애칭을 기사를 통해 전 세계에 알림으로써 한국 해병대의 상징어가 되었다. 그녀는 또 인천 상륙작전 종군 취재에 나서 월미도 상륙 당시 5번째 상륙정을 타고 해병대원들과 함께 상륙했다. 

이번에는 미군의 북진 작전에도 종군하여 1950년 11월  함경남도 장진호에서 미 해병 1사단이 12만 중공군에 맞서 용감하게 싸웠던 미 해병대의 참혹한 전투 상황을 생생하게 보도함으로써 여성 기자로는 최초로 1951년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그녀는 한국전 체험 경험을 담아 1951년 전쟁 비망록 <한국전쟁>(War In Korea)을 출간했다. 

히긴스 기자는 미군의 베트남전 종군 취재 도중 풍토병을 얻어 1966년 워싱턴의 미 육군병원에서 45세로 삶을 마감했다. 미국 정부는 종군기자로서 그녀의 업적을 기려 알링턴 국립묘지에 안장했다. 우리 정부는 2010년 9월 2일 히긴스 기자에게 외교 훈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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