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전쟁, 밀릴 데까지 밀렸다
문화전쟁, 밀릴 데까지 밀렸다
  • 미래한국
  • 승인 2013.03.15 1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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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남정욱 숭실대 문예창작학과 겸임교수


그냥, 충분히 예상 가능했던 일이다. 지난 수십 년간 우파는 정치, 경제 권력을 장악하고 오만을 떨었다. ‘야마’를 잡고 있으니 다른 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허술하게 내 준 게 혹은 방치한 게 문화권력이다.

우파는 세 가지를 간과하고 있었다. 문화는 ‘시간’과 ‘인간’을 다룬다는 것을. 그래서 문화권력에는 자연스럽게 역사권력이 딸려간다는 것을. 그리고 그 두 개가 합쳐지면 정치, 경제 권력 같은 건 모래 위에 쌓은 성만도 못하다는 사실을. 연극 ‘한강의 기적’ 대관 취소 사건이야기다.

좌파에 밀려난 '한강의 기적'

적법한 절차에 따라 대관 신청을 했고 극장의 이사장은 공연 시 관람하겠다는 말까지 했다. 이게 한 연극인의 발언 하나에 뒤집혔다.

‘공공기관이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하는 극장에서 이런 작품을 공연해도 되느냐’는 요지였다. 여기서 ‘이런 작품’이란 박정희 찬양을 노골적으로 해대는 연극이라는 설명이다.

‘한강의 기적’은 쿠데타 찬양이 아니라 제목처럼 한국 경제 부흥사 기록극에 가깝고 박정희 원톱 드라마도 아닌 정주영, 이병철을 함께 내세운 쓰리 톱이었다. 연극 말미에는 “우리가 이렇게 잘 살 수 있게 된 데에 진짜로 감사해야 할 인물은 김일성”이라는 대사까지 나온다. 북쪽과 경쟁하느라 이렇게 올라섰으니까 하면서 말이다.

연극인의 주장처럼 ‘이런 연극’이 되기에는 함량이 한참 부족한 작품이었다. 당연히, 그냥 무시하고 넘어가면 되는 사안이었는데 극장 측은 알아서 ‘기었다’. 소리는 하나였지만 얼굴은 다수였기 때문이다.

그 발언 뒤에 포진하고 있는, 향후 담당자들에게 얼마든지 불이익을 선사할 수 있는 거대한 ‘세력’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물론 이 세력은 오랫동안 방치한 좌파 문화권력이다.

우파가 좌파 문화권력을 인지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그 해악과 파괴력도 어느 정도 실감하고 있다. 그래서 가끔 벌인다는 일이 탈환 작전이다. 기관장을 교체하는 거다. 그렇게 쉽게 끝날 일이면 얼마나 좋을까. 기관장 하나 꽂아놔 봐야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다.

무슨 일 하나 추진하려고 하면 실무진들이 벌떼같이 들고 일어난다. 피로와 고독 속에서 기관장은 시름시름 말라죽는다. 수십 년 누적된, 그리고 지난 좌파 정권 10년 동안 급속히 팽창한 그 기세를 한 개인이 막을 수 있다면 그거야말로 초현실주의적인 일이다.

여기서 잠시 생각해 볼 문제가 하나 있다. 문화권력, 역사권력에 대한 성실한 이해다. 권력이란 그 힘을 행사할 수 있는 의지이기도 하지만 한 편으로 그것에 동조하는 지지자들의 집단 의지가 반영된 것이기도 하다. 즉 문화권력은 가시적인 것과 비가시적인 것의 혼합체라는 얘기다.

그 권력이 내세우는 이데올로기를 심정적으로 지원하는 수많은 동조세력은 각양각색의 방법으로 권력을 지원한다. 피켓시위를 벌이고 서명운동을 하고 댓글을 달고 SNS에서 주장을 퍼 나른다. 물론 매우 자발적으로.

안타까운 건 이들이 어려서부터 종북 사상에 심취한 반체제 극성분자들이 아니라 우파가 세심하게 보듬지 못한 우리 주변의 평범한 이웃들이라는 사실이다. 선의 방관은 악의 승리를 꽃피운다는 버크의 경구를 재확인한, “이 불순분자 새끼들 다 손톱깎이로 깎아 죽여야 해”라며 울분을 토할 사안이 아니라는 말씀이다.

소설가 이문열 씨는 “일반 국민은 보수와 진보가 50대50이지만 문화 쪽은 진보(좌파)가 거의 98%까지 장악하고 있다”면서 “문인들은 보수색(色)을 드러내는 즉시 불이익을 당한다”고 격정을 토로했다.

문화 쪽이 좌파 강세인 것은 별로 신기한 일이 아니다. 문화란 게 원래 기존 질서에 저항하면서 새로움을 창조하는 것이 아니던가. 해서 문화예술 쪽에 쓸 만한 인재가 하나 나오면 항상 붙이는 칭찬이 ‘체제 전복적 상상력’이다.

당연히 우리나라만 유독한 일도 아니다. 좌파의 왕국이기는 하지만 프랑스는 우리보다 더 했다. 1950년대 알제리 해방 전쟁이 일어났을 때 사르트르는 조국 프랑스의 제국주의적인 지배를 노골적으로 비난했다.

이 시기 “프랑스와 알제리 어느 한 쪽이 더 정당한지 판정을 내리기는 힘들다. 양쪽 모두 나름의 이유가 있고 양쪽 모두 잘못이 있다”고 말한 사람은 알베르 카뮈였다. 지식인 사회에서 유일하게 나온 정직한 발언이었다.

이 일로 카뮈는 프랑스 문화예술계의 ‘왕따’가 된다. 프랑스 좌파의 문화계 장악은 99.9%였다(여기서 남은 0.1%는 ‘없다’의 완곡한 표현이다). 프랑스뿐이 아니다.

대한민국에 대한 좌파 선전포고

1960년대 아메리칸 뉴 시네마를 꽃피운 할리우드는 전복(顚覆)의 공장(工場)이었다. ‘졸업’, ‘보니 앤 클라이드’, ‘작은 거인’ 등을 통해 기성세대의 위선은 물론이고 미국의 어두운 역사가 사정없이 까발려졌다. 중요한 건 1950년대 프랑스건 1960년대 미국이건 그들에게는 ‘북쪽’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당연히 ‘핵 소년’ 김정은도 없었고. 사람은 반드시 스스로를 업신여긴 후에 남이 그를 업신여기고 나라는 반드시 그 스스로를 친 후에야 남이 그 나라를 친다고 했다.

70년대 중후반 출판운동, 80년대 문화운동을 통해 좌파가 진지를 구축하고 내공을 다진 세월이 거의 40년이다. 물들이기에 대학생은 너무 늦다는 생각에 시작한 전교조도 20년이다.

전교조의 반국가, 반민족, 반역사 이데올로기 집중 교육 10년 동안 배출된 학생이 600만 명이다. 이들 대한민국 좌파 문화권력의 든든한 받침대가 있는데 ‘한강의 기적’이 무산된 게 그리 이상한 일일까.

한 가지 더. ‘한강의 기적’ 대관 취소는 단순하게 넘길 해프닝이 아니다. 대한민국에 대한 반대한민국 세력의 한 판 ‘뜨자는’ 선전포고다. 박정희에게서 친일파, 무자비한 독재자 이상의 의미를 끄집어내면 작살을 내겠다는 위협이다.

실은 신호탄은 이미 올랐다. 이른바 역사 다큐인 ‘백년전쟁’이다. ‘백년전쟁’의 타깃은 이승만이었다. 자유민주주의국가 건국, 농지 개혁, 교육 부흥, 한미동맹 강화를 통한 안보 구축이라는 이승만의 업적은 이 한 편으로 모조리 사기가 됐다. 그리고 그 자리를 대신한 건 하와이 갱단 두목, 침략세력의 콜라보(협력자) 그리고 추악한 권력자 이승만이었다.

이런 다큐들이 속편처럼 꼬리를 물고 제작되고 일부는 편집돼 다시 새로운 콘텐츠로 대중에게 무차별적으로 살포된다. 밀릴 데까지 밀렸다. 6.25로 치면 부산 하나 남은 셈이다.

치고 올라가야 할 것은 물론이고 인천상륙작전처럼 허리도 한번 끊어놔야 한다. 이승만과 박정희를 잃고 대한민국세력은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 마음 독하게 먹고 분발해야 하는 까닭이다.

남정욱 숭실대 문예창작학과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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