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의 롤모델을 찾아서
딸의 롤모델을 찾아서
  • 황성준 편집위원
  • 승인 2012.12.07 1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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린다 차베스의 <그럴 것 같지 않은 보수주의자>를 읽고
 

1995년 12월 체첸 남부산악지대에 위치한 베데노 마을에서의 이야기다. 당시 ‘체첸반군의 해방구’였던 베데노는 체첸반군의 주요거점으로, 러시아 행정력이 전혀 미치지 않는 곳이었다.

이 마을에 도착하자 체첸 게릴라 측에서 거처로 한 민가를 소개해줬다. 저녁때가 되자 식사가 나왔다. 삶은 양고기와 빵, 그리고 삶은 감자가 나왔다. 해발 2,000m에 달하는 험준한 산악지대를 그것도 지뢰밭과 저격병을 피하면서 올라오다 보니 매우 지친 상태였고 특히 배가 무척 고팠다.

그래서 음식이 나오자마자 접시를 깨끗이 비워 버렸다. 그리고 잠을 청하기 위해 자리에 누웠다. 그런데 밖에서 아이 우는 소리가 들리는 것이었다. 뭔가 잘못됐다는 느낌에 문을 열고 나가 봤다. 부엌에서 5세가량의 여자아이가 울고 있었는데 12세가량의 언니가 이를 달래고 있는 것이었다.

안주인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었더니 “아무 일도 아닙니다. 저녁은 잘 드셨는지요? 부족한 것은 없었는지요?”라고 말한 뒤 아이들을 데리고 방 안으로 들어가 버리는 것이었다.

식사를 남겼어야 했던 이유

다음날 이골 로타리 당시 이즈베스티야지(紙) 기자에게 야단(?)을 맞고서야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체첸에서 여자들은 남자들과 함께 식사를 하지 않는다. 남자들이 식사를 끝내면 여자들은 남은 것을 부엌에서 먹는다. 따라서 남자들은 식사의 일부를 남겨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여자들은 굶어야 한다.

또 손님을 환대하는 관습 때문에 집안에 있는 것을 모두 내놓았을 것이며 따라서 이를 다 먹어 버렸다는 것은 한 끼가 아니라 앞으로 한동안의 식량을 모두 없앤 것일 것이라는 설명이었다. 죄책감에 쥐구멍을 찾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날 오후 그 집으로 돌아가서 가지고 간 통조림을 내놓았다. 안주인은 사양했으나 “지나친 사양은 손님을 무시하는 행위”라며 겨우 설득, 받게 만들었다. 그리고 아껴둔 비상용 초콜릿을 뜰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에게 나눠줬다. 초콜릿을 들고 좋아하는 아이들의 모습, 지금도 눈앞에 선하다.

체첸은 철저한 남존여비(男尊女卑) 사회이다. 남자들은 일도 하지 않는다. 남자들이 하는 일이라고는 꾸란을 읽거나 무술을 연마를 하는 일이다. 집안일은 물론 농사일, 장사 모두 여성의 몫이다.

길을 갈 때도 남자들은 빈손으로 걸어가고 그 뒤에 여자들이 짐을 짊어지고 뒤따라간다. 이런 농담이 있을 정도다. 한 영국인 페미니스트 여기자가 있었는데 어느 날 체첸 여자들이 빈손으로 앞장서 가고, 남자들이 짐을 들고 뒤따라가는 모습을 목격했다. 여기자가 “어떻게 이런 천지개벽이 일어났는지”를 물었더니 “앞에 지뢰밭이 있거든”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는 것이다.

체첸의 현재는 우리의 과거

이러한 상황은 우리에게도 있었다. 그리 먼 과거 일도 아니었다. 우리의 어머니 세대 혹은 할머니 세대만 하더라도 유사한 상황이 우리에게도 일어났다. 여자들은 남자들이 남긴 밥을 부엌에서 먹어야만 했고 집안일은 물론 농사일 대부분을 전담해야 했다. 또 많은 누이들은 남동생 학비를 벌기 위해 구로공단 등지에서 졸음방지약 타이밍을 먹으며 미싱을 돌려야만 했다.

현재 상황은 다르다. 거의 모든 분야에서의 여성의 진출이 눈부시게 이뤄지고 있다. 남성 고유의 영역으로 간주되던 사관학교에서 여성들이 주름잡기 시작한 것은 이미 오랜 전의 일이며 각종 고시 합격자에서도 여성이 다수파로 올라서고 있다. 오히려 남성이 위축돼 갈 곳이 없어지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물론 여성차별이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다. 보이지 않는 ‘유리천장’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고 무엇보다 여성은 육아문제로부터 자유롭기 힘들다. 가사노동의 분배가 이뤄지고 있다 하지만 출산은 물론 육아문제의 대부분이 여성 몫으로 남아 있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애를 안 낳으려는 풍조, 더 나아가 결혼 자체를 회피하는 풍조가 젊은 여성들 사이에 만연하다. 또 ‘이상적 여성상’의 기준 자체가 변화하고 있다. 과거에 칭송되던 ‘신사임당’ 형은 더 이상 현대 젊은 여성에게 매력적인 이상형이 아니다.

페인트공의 딸에서 보수주의 리더로

대학생 딸을 둔 아버지로서 내 딸이 본받았으면 하는 여성상은 어떤 모습일까? 이 질문을 염두에 둔 채 <그럴 것 같지 않은 보수주의자>을 읽어 보았다. 이 책은 가난한 페인트공의 딸로 태어나 노조운동가를 지낸 히스패닉계 미국인 여성 린다 차베스의 자서전이다.

차베스는 레이건 정부 당시 백악관 고위관리로 일하고 아들 부시 행정부 시절 노동부 장관으로 임명된 바 있는 미국의 대표적인 보수주의 여성이다.(불법 이민자를 파출부로 고용한 사실이 폭로되자 스스로 장관 임명을 포기해서 장관직을 수행하지는 못했다.) 그녀는 어머니가 된다는 것이 희생을 요구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어머니로서의 기쁨 또한 크다고 주장하며 직장생활과 양육을 모두 성공적으로 이뤄낸 세 아이의 어머니이다.

책 제목에서 볼 수 있듯이 차베스는 보수주의자가 되기 힘든 조건을 두루 갖추고 있다. 히스패닉계, 노조 운동가, 여성 등등... 차베스도 초기에는 보수주의자가 아니었다. 그녀가 보수주의자가 된 것은 극단적 페미니즘의 반남성(anti-male)이 여성 자신들에게 해롭다는 사실, 그리고 성별과 인종에 따른 직장 쿼터제가 의도와는 달리, 성차별과 인종차별을 더욱 심화시킨다는 사실 등을 현장에서 깨달았기 때문이다.

‘근육의 힘’이 중요시되던 사회에서 남성의 우위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근육의 역할’은 현대사회에서 점점 줄어들고 있다. 그렇기에 ‘여성 지도자 시대’가 열리고 있다. 딸 가진 아빠로서 이를 환영한다. (미래한국)

황성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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