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기쁘게 사는 방송인 최선규의 비결
매일 기쁘게 사는 방송인 최선규의 비결
  • 미래한국
  • 승인 2011.09.09 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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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미가 띈다

 
너털웃음을 웃으며 출연자를 편안하게 해주는 최선규 아나운서. 탤런트 정애리 씨와 함께 CTS 신앙간증프로그램 ‘내가 매일 기쁘게’를 7년째 진행하고 있다. 정기적으로 진행하는 프로그램이 딱 하나 뿐이지만 눈코뜰새 없이 바쁘다. 인터뷰도 GS샵의 도네이션 프로그램 ‘따뜻한 세상 만들기’를 마치고 잠깐 틈을 내서 응해주었다. 국제 NGO 세이브더칠드런(Save the Children) 후원회장인 그는 ‘따뜻한 세상 만들기’에 호응해준 시청자들과 GS샵의 도움으로 소아암 환자를 돕고 있다고 소개했다.

그가 바쁜 이유는 ‘움직이면 돈’이었던 시절과 달리 돈과 상관없는 스케줄이 꽉 차 있기 때문이다. 더불어사는세상 해돋는마을 운영위원장으로 4년 전부터 서울역에서 노숙인과 독거노인을 돕고 있으며 기독교 관련 행사의 사회와 간증 집회 등으로 언제나 분주하다.

돈과 상관 없는 바쁜 스케줄

최선규 씨는 1986년에 KBS 아나운서로 입사해 SBS로 자리를 옮겼다가 1993년에 프리랜서로 나섰다. 프리랜서 시절 9개의 프로그램을 동시에 진행해 TV만 돌리면 나올 정도로 바쁜 MC였다.
그랬던 그가 공중파에서 자취를 감추고 어느 날 기독교 TV에 얼굴을 내밀었을 때 많은 사람이 놀랐다. 외가에서 절을 두 개나 지은 불심 깊은 집안 출신으로 불교학생회장을 지냈기 때문이다. 독산동의 외갓집은 아예 집안에 법당을 차려놓았을 정도였다. 그런 그가 사고로 사경을 헤매던 딸이 기적적으로 나으면서 기독교인이 됐다.

“지금 스물두 살인 혜원이가 세 살 때 2.5톤 타이탄 트럭에 깔려서 거의 죽었다 살아났거든요. 이삿짐센터 차에 치었는데 나중에 조서를 보니까 운전사가 뭐가 걸린 것 같아 뒤로 한 번 더 갔다잖아요. 아이 배 위로 트럭이 두 번 지나간 거죠.”

생방송 도중에 아이가 응급실에 있다는 메모를 받은 그는 당시 여의도에 있던 SBS 사옥에서 급하게 차를 몰고 영등포에 있는 병원으로 향했다.

“그날이 토요일이었는데 영등포 로터리가 꽉 막혔어요. 차 안에서 제가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잖아요. 불교신자였던 제 입에서 갑자기 ‘하나님 살려주세요!’라는 소리가 나왔어요. ‘우리 딸만 살려주시면 당신 살아 계신 거 인정하고 당신 시키는 거 다 하겠습니다”라며 절규를 했어요. 평소 10분이면 가는데 그날 1시간이 걸렸어요. 차 안에서 정말 얼마나 울부짖었나 모릅니다.”

병원에 도착하자 어머니와 아내, 형수가 응급실 입구에서 울고불고 난리가 난 상황이었다. 

“애가 죽었구나 하는 생각에 맥이 풀렸죠. 응급실 맨 끝에 아예 흰천으로 얼굴을 덮어 놨더라구요. 행정적인 절차만 밟고 영안실로 가기 직전이었는데 흰천을 들치자 애가 자고 있는 것 같이 보여요. 애를 안고 ‘집에 가자, 혜원아’ 하면서 막 우는데 갑자기 애가 뜨끈뜨끈해지면서 기분 좋은 열기가 느껴지는 거예요. 애가 꾸물럭꾸물럭 하더니 컥컥 소리를 내요. 손가락을 입에 넣었더니 검붉은 핏덩이가 나오는 거예요. 그제야 아이가 ‘아빠 아빠 우리 아빠지’ 그러더군요.”

기적적으로 살아난 딸이 그때부터 2년 동안 치료 받았을 정도로 큰 사고였다. 그날 저녁 병원으로 온 친구 중에 모태신앙인이 있었다.

“낮에 차에서 부르짖었던 얘기를 했더니 그게 서원기도였다며 ‘하나님과 거래를 했으니 안 지키면 애를 다시 데려간다’는 거예요. 안 들었으면 모를까 무섭더라구요.”

교회에 가야 한다는 부담감은 있었으나 발을 들여놓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던 중 방송 출연으로 알게 된 평강한의원의 이환용 원장이 그를 사랑의교회로 인도했다.

기적적으로 나은 딸

 

갈비를 사주시고 계절이 바뀔 때마다 보약을 지어 택배로 보내주셨어요. 그렇게 1년을 해주셨을 때 미안해서 혼자 다닐 수 있다고 했죠. 전도를 하려면 돈을 써야 한다는 걸 그때 배웠습니다.”
그렇게 8년 동안 사랑의교회 주일 예배에 참석했다. 당시 잘나가는 MC로 한 달 수입이 1억 원이 넘었던 그는 정해놓고 다니는 술집만 다섯 군데였다.

“선데이 크리스천으로 뺀질거렸죠. 세상적으로 잘나가니 예수님은 필요 없고 인간 네트워크만 중요했죠. 아내 몰래 5,000만 원 정도는 늘 갖고 있었어요. 좋은 술집에 가서 술 사주니 친구들한테 인기가 많았지요.”

그러면서도 교회에서 행사가 있으면 진행을 맡았다. 2000년에 세례 안 받은 걸 안 옥한흠 목사의 권유로 세례를 받고 1년 동안 제자훈련을 받았다.

“그때 마음이 뜨거워져서 옥 목사님께 ‘저 신학교 가겠습니다’ 했더니 ‘교회가 6만개다. 거기 숟가락 하나 더 얹어서 뭐하려고 그러냐. 하나님이 주신 귀한 달란트로 복음 전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라’고 하시는 거예요. 그때는 참 섭섭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참 맞는 말씀이에요. 제가 목사가 돼 말씀 전하고 간증하면 ‘목사니까 당연하지’라고 하겠지만 평신도여서 더 마음을 여시는 것 같아요.”

최선규 씨는 간증집회를 가면 일부러 세례 안 받은 사람을 일어서게 한다.

“의외로 세례 안 받은 사람이 많아요. ‘세례는 인간이 요식행위이고 다른 교회 못 가게 하는 점조직 만드는 거라고 생각했다. 애가 태어나면 동사무소에서 출생신고를 해야 내 자식이 되듯이 세례는 하나님께서 많은 사람 중에 ‘너는 내 자녀’라고 점 찍어주시는 거다’ 이러면서 쉽게 풀이해 줍니다. 집회를 다녀온 후 한 교회에서 한꺼번에 200명이 세례를 받은 적도 있어요.”

사랑의교회에 오정현 목사가 부임하면서 청년들이 엄청나게 늘어나 본당에서 예배 드리려면 30분씩 줄을 서야 했다. 그즈음 집에서 가까운 분당중앙교회로 옮겼다. 아내가 두 아이와 함께 캐나다로 떠나 혼자 지낼 때였다. 그런데 캐나다에서 적응을 못한 혜원이가 사춘기를 심하게 앓으면서 하지 말라는 짓만 골라서 했다. 모범생인 아들과는 딴판이었다.

철야예배에서 변화되다

“하나님께서 해결해주시는 수밖에 없다는 생각에 철야예배에 가서 기도를 드렸어요. 6개월이 지나도 응답이 없어요. 새벽 1시까지 울며불며 ‘하나님 우리 딸 좀 만져주세요. 고쳐주세요’라고 간절히 기도하는데 ‘너는 매번 나한테 해달라는 것만 있냐. 넌 나한테 해준 게 뭐 있냐’ 그런 마음이 드는 거예요. 그래서 ‘세상의 주인이신데 뭐가 부족하십니까. 하나님, 저한데 원하는 게 뭔데요. 뭐든지 다 하겠습니다’ 그랬어요. 그 때 ‘술 끊어’ 딱 세 글자가 떠오르는 겁니다.”

그때까지도 금요일과 일요일만 빼고 매일 술을 마셨다고 한다.

“도저히 자신이 없어서 ‘제 힘으로는 3일 밖에 못 끊습니다. 하나님이 끊어주세요’하고 기도드린 뒤에 집에 왔어요. ‘하나님이 원하시는 거면 한 번 해보자. 단, 내가 먼저 전화는 하지 말자. 그러나 오는 전화는 안 막는다’ 이렇게 결심했어요. 매일 네다섯 시면 친구들이 기러기랑 밥 먹어주겠다며 전화했는데 신기하게도 1주일 동안 한 통의 전화도 없었어요. 다음 금요철야 때 ‘주여, 술 끊었나이다’하고 소리를 질렀어요. 제가 생각해도 기특한 거예요. 그때 ‘집에 있는 술은 안 버리냐?’ 그런 마음이 드는 거예요. 집에 와보니 선물 받은 고가의 술이 몇 백만 원 어치나 있더군요. 사업하는 친구한테 회식할 때 쓰라고 다 줘버렸죠. 그날 이후 ‘이제 술 안 마신다’고 선포했더니 밤에 부르는 친구가 없어요. 간혹 모임에 가면 이제 사이다를 줍니다. 아내도 금식기도를 많이 했는데 혜원이가 그 이후 조금씩 좋아졌어요.”

술을 끊은 후 정애리 권사를 비롯한 몇몇 크리스천들과 성경공부를 시작했다. 그즈음 기도 중에 ‘서울역에 가서 사역하라’는 마음을 주셨고, 얼마 후 또 다른 체험을 했다. ‘팔복’을 만든 김우현 감독이 이끄는 집회에 갔을 때였다.

“집회가 6시간이나 계속 될 정도로 분위기가 뜨거웠어요. 그날 방언이 터졌는데 갑자기 하얀 옷을 입은 분이 내 앞에 떡 버티고 있는 거예요. 직감적으로 예수님이라는 걸 깨달았죠. 키가 너무 커서 얼굴은 안보이고 대신 들고 계신 오른발이 보였어요. 어마어마한 왕발 아래 제가 벌레처럼 작게 느껴졌어요. 그 순간 저 발에 한 번 밟히면 아무 소리 못하고 죽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나도 모르게 ‘주여, 잘못했습니다. 용서해주세요’하고 외쳤어요.”

눈을 떠보니 담요를 덮고 있었다고 한다.

“거의 한 시간을 데굴데굴 구르면서 ‘잘못했습니다. 용서해주세요’라고 했대요. 목사님과 전도사님이 팔다리를 주무르면서 안수기도 해주시니 얌전해져서 30분 정도 자고 일어난 거라고 하더군요. 어떤 시련과 유혹이 와도 이겨낼 자신감이 생겼어요. 그 발에 밟히면 나는 죽는다는 걸 아니 절대 딴 짓을 할 수가 없죠.”

얼마 후 이장호 감독의 소개로 노숙인 쉼터를 위한 음악회의 사회를 보게 됐다. 거기서 더불어사는세상 해돋는마을을 이끄는 신생교회 김원일 목사를 만났다. 김 목사는 12년 전부터 노숙인과 독거노인을 섬기고 있다. 청량리역이 민자역사로 바뀌면서 서울역으로 사역지를 옮겼다.

노숙인들의 친구가 되다

최선규 씨는 철야기도 때 ‘서울역으로 가라’는 말씀을 기억하고 4년 전부터 해돋는마을의 운영위원장을 맡았다. 서울역 13번 출구 앞에 있는 채움터 건물에서 수요일과 일요일에 노숙인, 쪽방촌 사람들, 노인들과 예배 드리고 식사를 대접한다. 평균 500명 정도 모이는데 그때마다 나가서 밥퍼 봉사를 하고 노숙인들의 친구가 돼 준다. 다른 요일은 채움터 바로 옆에 임대한 건물에서 노인 250명에게 식사를 대접한다.

“4년 전에는 제대로 된 물건이 없었어요. 주변의 도움으로 악기 스피커 앰프 다 바꾸고 중고 피아노에다 그릇까지 다 들여놨죠. 개인과 교회에서 후원해 주시지만 매일 점심을 마련하는 일이 쉽지는 않아요. 모자랄 때면 그거 해결하느라 분주하죠.”

돈 안 되는 일로 바쁘다보니 요즘 마이너스 통장을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잘나가던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다고 했다.

“그때는 기쁨이 없었잖아요. 지난 1주일 동안 살았던 거 상세히 써보세요. 내가 하나님 이 기뻐하실 일을 했는지 안했는지 다 나와요. 저의 1주일을 정리해보면 다 하나님 일로 움직였어요. 세상 사람들과 쓸데없는 시간 보낸 적 없고, 누굴 만나도 하나님 얘기를 하고, 전도한 사람한테 밥 사러 가고 그랬어요.”
그는 ‘내가 매일 기쁘게’를 통해 은혜와 도전을 많이 받는다고 했다.

“출연자들 가운데 98%는 하나님을 만났고 하나님과 소통하는 법을 아는 분들입니다. 그 분들은 삶이 달라요. 세상 근심 걱정이 없어요. 하나님과 소통하는 게 어떤 건지 궁금했는데 다름 아닌 ‘기도’예요. 많은 사람들이 기도할 때 ‘이렇게 해주세요 저렇게 해주세요’ 라고 결론을 내리고 기도하잖아요. 그 분들은 하나님 뜻에 맡깁니다. 저도 배워서 ‘제 모든 것을 아시는 주님, 주님 마음대로 하세요. 그대신 제가 하나님 말씀을 거역하지 않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합니다.”

그는 요즘 다시 새신자가 됐다고 한다. 분당중앙교회가 분쟁으로 시끄러워 할렐루야교회에 출석하고 있다. 앞으로의 계획을 묻자 “그게 없다”고 답했다.

“기도제목은 하나 있어요. 사람인지라 기분 나쁘면 불쑥불쑥 올라올 때가 있어요. 그런 마음 안 들고 하나님 말씀에 언제까지든 순종하게 해달라는 거지요.”

최선규 씨의 친가는 모두 교회에 나가고 외가 식구들은 성당에 다닌다. “나 하나 당겨서 다 끌어오셨으니 하나님이 남는 장사 하셨다”며 웃었다. 아들은 미국 캔사스주립대학에 재학 중이고 성악을 공부한 혜원이는 지금 스튜디어스가 되려고 준비 중이다.

바쁘다던 그는 함께 간 사진작가가 크리스천이 아니라고 하자 “내 중심으로 살았는데 모든 게 하나님 중심으로 바뀌니 얼마나 좋은지 모른다”며 예수 믿으라고 한참을 설명했다. 다음 일정 때문에 일어서는 그에게 “마이너스 통장이 걱정되지 않느냐”고 하자 “그런 걸 뭐 걱정해요. 하나님이 교만하지 않도록 꼭 그만큼씩 채워주십니다”며 활짝 웃었다.

글 / 이근미 편집위원 www.rootlee.com
사진 / 이 경 포토그래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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