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개혁 아닌 가치관 회복이 필요하다
사회개혁 아닌 가치관 회복이 필요하다
  • 황성준 편집위원
  • 승인 2012.09.11 0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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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시스 후쿠야마의 <대붕괴>를 읽고
황성준 편집위원·동원대 초빙교수

몇 해 전의 일이다. 우연히 우리 아파트의 한 청소부 아주머니와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아침운동을 마치고 돌아오던 길에 만나 “잘 지내십니까”라고 상투적 인사를 건넸는데, 잠깐 시간이 있느냐면서 고민을 털어 놓는 것이었다. 이 아주머니의 고민거리는 실업자 아들이었다. 군대를 마치고 대학을 졸업한 20대 후반의 청년이었는데, 취직할 생각은 하지 않고 빈둥거린다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건성으로 들었다. 빨리 집에 들어가 샤워를 하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또 이런 고민을 들어봐야 필자가 해결해 줄 수 있는 일이 있을 리 만무하며, 따라서 마음의 부담만 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주머니의 태도가 너무 진지해서 그냥 외면하기는 힘들었다.(사실 고민을 이야기하는 이유는 해결 방안을 찾기 위해서라기보다는, 고민을 경청해 주고 공감해 줄 사람 자체가 필요했기 때문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할 수 없이 이야기를 들었는데, 다 듣고 나니 너무 화가 났다.

청소부 아주머니의 탄식

이야기인즉, 아들이 자가용을 사 달라고 조르고 있다는 것이다. 아들 왈, “친구들은 다 자동차가 있는데, 나만 없기 때문에 함께 어울릴 수 없다”는 것이었다. 아주머니는 저축한 돈이 약 2000만 원 가량 있는데, 이 중 1000만 원을 인출해서 중고차 한 대를 사줄까 하고 고민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인데, 기죽고 사는 꼴을 보니 안타깝다”는 것이었다. 기가 막혔다. “절대로 사 주면 안 됩니다. 그것은 아드님을 위한 일이 아니라 망치는 일입니다”라고 거듭거듭 이야기했다.

최근 돌아가는 세태를 두고 한탄 소리가 여기저기서 나오고 있다. 특히 나이 드신 분들은 ‘말세’라는 표현까지 사용하고 있다. 가족은 날로 파괴되고 있으며 온갖 흉악범죄가 늘어가고 있다. 도대체 무엇이 ‘정상’이고, ‘비정상’인지 자체가 모호해진 시대가 된 것이다. 이 같은 상황을 프란시스 후쿠야마 교수는 ‘대붕괴’(The Great Disruption)라고 명명하면서 현재 시대의 위기는 단순한 정치·경제의 위기가 아니라 ‘도덕의 위기’라고 지적하고 있다.

후쿠야마 교수는 이러한 ‘대붕괴’가 야기된 것은 산업화 시대가 정보화 시대로 전환됐지만 이러한 사회경제적 변화에 조응하는 ‘도덕과 문화’를 내면화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후쿠야마는 우선 가족파괴, 범죄증가, 가치관 혼란과 같은 ‘대붕괴’ 현상의 원인을 가난 혹은 빈부격차에서 찾는 좌파들의 논리를 실증적인 자료와 데이터를 토대로 하나하나 공박한다.

가난했던 시절에 범죄가 더 적었던 적이 더 많을 뿐만 아니라 빈부격차와 범죄증가와의 실증적 함수관계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가족붕괴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아니 오히려 복지증대가 가족파괴와 범죄증가를 촉진시키는 경우가 더 많다는 것이다. 대표적 사례가 미국의 미혼모 보조금 지급사례인데 이 제도로 인해 미혼모가 더욱 증가되고 이러한 미혼모의 증가로 인한 결손가정 비행 청소년이 증가됐다는 실질적 경험적 연구 결과들을 소개하고 있다.

가치붕괴 현상의 이유들

그러나 후쿠야마는 대붕괴의 원인을 좌파진영의 복지정책에서만 찾는 입장에는 반대한다. 굳이 표현하자면 좌파의 복지국가 정책이 대붕괴에 기여한 것은 15% 정도라는 것이다. 또 엄격한 처벌이 범죄예방에 도움이 되며 좌파의 범죄에 대한 온정주의가 범죄 확산을 방조한 것이 분명하지만 역시 엄격한 처벌만으로 범죄 증가를 억제할 수 없다고 지적하고 있다.

왜냐하면 많은 일탈적 범죄 특히 청소년 범죄의 경우 범죄 이후 결과에 대해 생각하지 않은 ‘즉흥적’ 혹은 ‘동물적’ 범죄이기 때문에 처벌에 대해 거의 두려움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즉 ‘선과 악’에 대한 기본 개념을 상실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범죄와 처벌에 대한 ‘합리주의적 손익계산’(?)이 결여돼 있기 때문에 법과 처벌 자체를 무서워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본질적 문제는 ‘도덕과 가치관의 붕괴’이며 따라서 시대에 조응하는 ‘도덕과 가치관’을 재구성(reconstitution)해야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도덕과 가치관’을 강조한다는 측면에서 후쿠야마는 ‘에드먼드 버크(Edmond Burke)의 보수주의’와 유사성을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후쿠야마는 자신이 버크주의와 입장이 다름을 분명히 한다. 후쿠야마에 따르자면 버크주의자들은 “현 도덕의 위기가 계몽주의(Enlightenment) 이후 계속돼온 이성(reason)에 대한 지나친 확신과 이로 인한 전통과 교회의 붕괴 탓”이라고 보는데 ‘대붕괴’는 사회경제적 변화의 산물이며 이러한 현상은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이전될 때도 존재했다는 것이다.

즉 ‘도덕의 위기’가 계몽주의 이후 계속된 것이 아니라 산업사회로 이전할 때 발생했다가 산업사회가 안정되면서 이에 조응하는 ‘도덕’이 재구성되고 도덕의 위기가 사라졌었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다시 산업사회가 정보화 사회로 이전되면서 현재의 대붕괴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도덕의 위기가 계몽주의 이후 지속돼온 것이든 사회경제적 변화로 인해 20세기 후반에 재현된 것이든 분명한 것은 현 시대가 도덕의 위기 시대라는 점이며 이러한 위기는 단순히 정치·경제만으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다. 이러한 점에 대해서는 후쿠야마도 적극 동의하고 있다. “선과 악의 문제, 그리고 도덕의 문제는 종교의 문제”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영국의 경우 농경사회에서 산업화 사회로 이행하면서 도덕의 위기를 맞이했는데 바로 그러한 위기 속에서 등장한 것이 존 웨슬리(John Wesley)의 신앙부흥운동(Great Awakening)이며 이 운동이 19세기 대영제국의 정신적 가치가 됐던 빅토리아 가치(Victorian Value)의 토대가 됐다는 것이다. 미국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신앙부흥운동’을 통해 도덕과 사회질서를 회복(혹은 재구성)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후쿠야마는 위기극복과 사회질서 재구성(reconstitution of social order)에서 ‘종교의 역할’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선과 악’에 대한 기본 가치에 대한 재구성이 이뤄지지 않는 한, 좌든 우든 공리주의(utilitarianism)적 한계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는 선과 악의 문제를 “최대 다수의 공익(utility)’의 증대” 문제로 대체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도덕의 위기를 극복하게한 신앙부흥운동

만약 문제를 ‘유틸리티’ 입장에서만 바라본다면, 효율이란 이름하에 그 모든 것이 정당화되든지, 아니면 가치에 대한 ‘주관적 상대주의’ 속에서 모든 가치를 부정하는 허무주의(nihilism) 혹은 그 쌍생아인 쾌락만능주의(Hedonism)로 빠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바로 이 지점이 현 도덕의 위기의 본질이며, 근본원인이다. 물론 이러한 지점이 그동안 분리돼 있었던 ‘정치’와 ‘도덕’이 다시 만나야 하는 자리이기도 하다.

물론 이러한 만남이 과거 중세로의 복귀 혹은 신정정치(神政政治)의 부활일 수는 없다. 그러나 가장 기본적이고 가장 최소한의 도덕적 가치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며 이러한 최소한의 합의는 ‘다원주의적 원칙’ 하에서 이뤄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사회·경제적 지표를 살펴보면 현재 대한민국은 ‘단군 이래의 최대의 번영’을 누리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런데 이러한 객관적 사회경제지표와 관계없이, 오늘날의 대한민국은 ‘가장 불만이 고조돼 있는 사회’이기도 하다. 이 모순돼 보이고, 또 뛰어넘을 수 없는 심연이 놓여 있는 것 같은 이 현상은 이른바 사회개혁으로 해결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사실 쉬운 일이 모든 문제를 ‘남의 탓’으로 돌리는 일이다.

특히 실체가 분명치 않은 ‘사회 탓’으로 돌리는 방법이 아무에게도 욕먹지 않으면서 개혁적인 척하기 쉬운 방식이다. 현재 도덕의 위기는 ‘소통’이란 이름하에 ‘비위 맞추기’를 통한 인기영합에 여념이 없는 ‘거짓 멘토’들 덕분에 증폭되고 있다. “그래 네 잘못이 아니야, 모두 사회구조 탓이야”라며, 값싼 위로를 남발하며, 이를 통해 얻은 인기를 바탕으로 자신들이 그토록 경멸하는(겉으로만?) 부와 권력을 누리는 자들이 설쳐대는 세상이 되고 있다.

이들은 ‘절대적 가치’를 부정하며 ‘문화적 상대주의’를 옹호한다. 그런데 재미 있는 것은 이들은 ‘절대적 가치가 없다’는 가치를 ‘절대적으로 신봉’하고 있으며 ‘문화적 상대주의’라는 이름의 또 다른 ‘절대주의’를 숭상하고 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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