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양의 중심에서 PAS를 보다
태평양의 중심에서 PAS를 보다
  • 미래한국
  • 승인 2013.11.20 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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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립 20주년, 해외봉사 개척 민간외교 첨병
정동구 태평양아시아협회(PAS) 회장

몇 년 전부터 청년해외봉사가 붐을 이루고 있다. 가까이 동남아의 인도네시아부터 멀리 아프리카의 가나까지, 최근에는 대학생뿐만 아니라 휴가를 이용한 직장인 대상의 봉사 프로그램도 많이 생겨났다.

여기에도 원조가 있다고 해야 할까. 해외봉사라는 단어조차 낯선 시절, 일찍부터 청년해외봉사단을 조직해 태국, 몽골, 베트남, 캄보디아 같은 국가들의 오지에 나가 봉사활동을 벌인 단체가 있다. 청년들이 시야를 태평양 국가로 넓혀야 한다는 취지에서 1994년 출범한 태평양아시아협회(PAS)가 창립 20주년을 앞두고 있다.

PAS는 창립하고 준비기간을 거친 후 1997년부터 현재까지 한 해도 쉬지 않고 매년 두 차례 200~400여 명씩 모두 7788명(총 17기)의 청년봉사단을 파견했다.

PAS는 당초 민간단체로서 태평양아시아를 하나의 우호적 네트워크로 연결한다는 취지로 설립된 단체다. 이를 위해 청년해외봉사뿐만 아니라 역내 각국의 지도층 및 차세대 지도자 간 인적 유대를 구축하는 사업을 중점 추진했다.

본지는 PAS의 정동구 회장을 만나 선구적으로 태평양 국가에 주목해 NGO 간 우호협력을 추진한 배경과 청년해외봉사를 앞장서 추진해 온 의미를 들어봤다.

정동구 회장은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레슬링 종목에서 광복 후 처음으로 금메달을 획득한 양정모 선수를 코치로서 지도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후 한국체대 교수와 총장을 거치고 대한체육회 이사, 체육인재육성재단 이사장을 역임한 체육계 원로다.

- 내년이면 태평양아시아협회(PAS) 설립 20주년이라고 들었습니다.

한 해에도 많은 단체들이 생기고 없어지는데 민간단체가 20년 동안 활발하게 활동했다는 것 자체가 의미가 크다고 봅니다. 청년해외봉사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시 대학은 운동권 학생들이 동아리를 통해 동료 학생들의 의식화 교육을 강하게 했어요. 그래서 대학생들이 이념적으로 좌편향으로 치우친 상황이었죠. 봉사활동인 농활도 이념 운동 성격이 강했고요.

그때 고 김상철 창립 이사장 등이 “이래서는 안 된다. 청년들에게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알리면서 해외 국가를 원조할 수 있다는 자긍심을 줘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초점을 대학생에게 뒀어요. 대학생들 대상으로 차세대 리더십 훈련을 하면서 동시에 우리 이웃 나라에 나가서 직접 현실을 보고 대한민국이 얼마나 훌륭한 나라인지 느끼라는 것입니다.

한국을 태평양시대의 중심에 놓은 태평양아시아협회

- 굳이 태평양을 앞에 놓고 태평양아시아협회라고 명명한 이유가 있나요?

창립 과정을 함께 했던 류우익 전 통일부 장관이 내신 아이디어예요. 그분이 지리학자시잖아요. 아시아태평양은 아시아에 국한돼 있어 한계가 있고, 태평양아시아는 미국, 일본 등까지 포함한 태평양 연안 국가가 주요 국가가 되는 개념이죠. 태평양시대에 한국이 중심 국가가 되자는 의미입니다.

- 주력했던 사업들을 좀 소개해 주시죠.

전후 60~70년대에 우리보다 잘 살았던 나라들이 지금은 우리보다 상황이 못한 나라들이 많습니다. 이런 데 나가서 봉사를 하고 국위 선양도 하면서 우리나라에 대한 자긍심도 찾자는 것입니다.

초창기에는 각 국가의 저명인사를 모시고 ‘아시아리더 컨퍼런스’를 개최하기도 하고, 우리나라에서 일하는 외국인 노동자들을 초청해 ‘아시아퍼레이드’를 하면서 주변 국가 간 민간단체 네트워크를 구축하려 했어요. 최근에는 청년들의 해외봉사활동에 주력하고 있습니다. 한 번 나갔다 오면 모두 애국자가 돼서 돌아옵니다.

- 국내에 해외봉사라는 개념 자체가 미미했던 시절부터 청년해외봉사 활동을 했었죠?

우리가 초창기 개척자였습니다. 1997년부터 정기 기수로 매년 400여명은 해외봉사를 나갔어요. 지금까지 거의 8000명 가까이 되는데 민간단체가 거의 20년 간 이처럼 꾸준히 사업을 진행한 것은 거의 유례가 없을 겁니다.

당시는 해외에 봉사하러 나간다기보다는 노무자들이 일하러 가는 경우가 많았어요. 저희가 해외봉사를 시작할 땐 한국국제협력단(KOICA)도 농업기술자, 의사 등을 보내는 사업을 위주로 할 정도였죠. 우리는 어린 학생들의 시야를 넓히고 현지에 가서 그 나라 주민에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일을 했어요.

인도네시아, 태국 같은 데 가게 되면 사전에 지역 특수성을 조사해서 필요한 것을 찾아 각자 할 일을 분담합니다. 사전 준비를 철저히 하고 현지에는 3주 정도 머무는데 그 기간 동안 영어, 한국무용, 태권도 등을 가르치는가 하면 집수리도 하고 외벽 벽화도 그려주는 식으로 다양한 프로그램을 수행합니다. 몇 년에 걸쳐 건물을 지어서 교회나 학교를 만들기도 해요. 그러니 현지 사람들이 정말 좋아합니다.

끝날 때쯤이면 주민들이 붙들고 울어요. 저희는 같은 지역에 지속적으로 가는 편인데 그래서 지역 주민들이 저희를 많이 기다려요. 올해는 인도네시아, 라오스, 캄보디아, 베트남, 몽골, 네팔 등 12개 국가에 갔다 왔습니다.

- PAS가 다른 해외봉사단체에 비교해 좀 더 내실 있게 운영되는 것 같습니다.

애초부터 지역 전문가를 양성한다는 취지로 차세대 리더십 트레이닝 코스를 만들었습니다. 봉사를 떠나기 전 6개월 동안 3차례 단체연수를 하면서 봉사활동에 대한 전체적인 교육을 실시합니다. 물론 국가관 교육도 포함돼 있고요. 그리고 단체연수 사이사이에 팀별로 자체 워크숍을 하면서 학생들이 스스로 프로그램을 만들어요. 이때 경험 있는 단장이나 인솔자가 구심점이 되죠.

 

해외봉사의 개척자, PAS청년해외봉사단

놀다오는 게 아니라서 건강관리도 중요하게 봅니다. 오지에 가서 봉사활동을 한다는 게 육체적으로 힘들거든요. 그래서 러닝 같은 운동을 꾸준히 하라고 독려합니다. 초창기에는 체력이 고갈된 단원이 쓰러져 입원하는 경우도 생겼어요. 이렇게 되면 다른 동료들한테도 피해가 가죠. 그래서 봉사활동 기간에는 담배나 술도 금하고 있습니다.

- 회장님도 실제로 봉사 현장에 많이 가셨나요?

저도 10회 이상 갔습니다. 1997년 1기와 함께 처음으로 태국에 가서 건물을 올렸어요. 1기 때 가서 기초 닦고, 1998년 2기가 가서 벽돌 올리고, 그 다음에 철골 세우는 식이었죠. 그렇게 3층 건물을 지었어요. 1997년부터 2002년까지는 교회와 유치원을 지어줬습니다. 태국의 미얀마 국경 지대에 있는 수원풍 마을인데 기독교도라는 이유로 미얀마에서 박해 받다 이주한 카렌족이 많이 거주하는 곳이에요.

- 많은 학생들이 다녀왔는데 해외봉사 이후에는 어떤가요?

한국국제협력단(KOICA)의 프로그램에 참여해 장기 봉사활동을 가는 식으로 봉사활동을 계속하는 경우가 꽤 있어요. 대개는 일반 직장생활을 하는데, 저희 봉사단에 다녀오면 가치관이 긍정적으로 변하죠. 우리나라 1950~60년대 정도의 상황에서 고생하는 현지인들을 보면 그전에는 대한민국에 대해 헐뜯고 비관적이던 사람들이 바뀌게 됩니다.

그리고 봉사활동을 다녀온 학생들 위주로 PAS 집행부를 구성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봉사단의 멘토 역할을 수행하는데 국내 연수할 때부터 팀 리더로서 역할을 합니다. 해외에 나가면 단장이나 인솔자 외에도 이 친구들이 안내를 많이 하죠.

- 한국국제협력단 코이카(KOICA)와는 어떻게 다른가요?

정부기구인 코이카는 6개월에서 3년 정도까지 되는 장기 프로젝트
위주로 운영해요. 공적개발원조(ODA)라고 해서 저개발 국가에 대한 지원 차원의 사업이죠. 지역도 아프리카 등 멀리 가는 게 많고요.

반면에 PAS는 가까운 태평양아시아 지역 위주로 단기간 운영되는 프로그램입니다. 다만 저희 봉사활동도 코이카에서 총괄 관리를 합니다. 일정과 활동 계획서를 제출하고 상호 검토하고 협의를 거칩니다. 앞으로는 우리도 프로그램을 확대해서 코이카나 정부 부처 지원을 받아 스포츠계 지도자를 해외에 장기 파견할 계획도 갖고 있습니다.

- 오지에서 봉사를 한다는 게 쉽지 않은데 학생들의 지원은 많이 있나요?

PAS 청년해외봉사단은 뿌리를 내렸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녀 온 학생들이 후배들에게 권유를 하는 식으로 계속 확대되고 있어요. 학교에서도 추천하고 있고요. 비용은 한 명당 200만 원 정도 드는데 대학과 협회, 본인이 3분의 1씩 부담하고 있습니다. 저소득층 자녀에게는 협회 지원이 더 많고요. 협회는 매년 교육부로부터 일정 금액을 지원받고 있습니다.

20년 전부터 ‘아시아 패러독스’ 해결에 나선 PAS

PAS 태평양아시아협회는 정동구 현 회장과 함께 1994년 당시 고 김상철 창립 이사장과 이동원 전 외무부 장관, 류우익 전 통일부 장관 등이 주축이 돼 창립됐다.

창립 취지문을 보면 ‘세계가 좁아지고, 왕래가 빈번해지고 있다. 그러나 아시아 각국은 아직 뿔뿔이 흩어져 있다. 아픈 역사의 멍에를 짊어지고, (중략) 과거에 매달리고만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중략) 우리는 순수한 민간단체로서 태평양아시아를 하나의 선린적 네트워크로 연결하는 역할을 떠맡으려 한다’고 밝히고 있다. 최근 박근혜 정부의 외교정책 축의 하나인 ‘아시아 패러독스’를 해결하려는 시도를 선구적으로 추진했던 셈이다.

1994년 PAS 창립 기념식 리셉션

- 회장님은 PAS 창립 때부터 실질적으로 참여하셨죠. 창립 과정을 좀 소개해주시겠어요.

1994년 고 김상철 창립 이사장을 처음 만났어요. 당시 역삼동 소재 변호사 사무실에서 한 5시간 정도 대화를 했을 거예요. 김 이사장께서 태평양 국가 NGO 간 우호협력을 이끌 민간단체가 필요하고 각국을 연결할 차기 리더들의 네트워크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어요. 저도 그 뜻에 공감했죠.

그래서 태평양아시아협회(PAS)가 탄생된 거예요. 당시엔 실무적인 일도 제가 다 했습니다. 빌딩 사무실도 알아보고 전화기도 제가 놨죠. 지금 사무실에 있는 탁자나 의자에 모두 돌아가신 김 이사장과 저의 손때가 묻은 거예요.

- 회장님은 이미 한국체대 총장까지 지내시면서 소위 말하는 성공한 인생을 사셨는데 PAS 창립 과정에서 어려운 일을 도맡아 하셨네요. 20년 간 일하시면서 힘든 점도 많았을 것 같습니다.

2005년 힘든 시기가 있었어요. 당시 어느 정도 자금이 모아져 있었는데 여기에 대해 나쁜 욕심을 가진 사람들이 협회를 어지럽힌 거죠. 이 혼란기에 그동안 어렵게 PAS를 이끌어 오셨던 고 김상철 창립 이사장도 본의 아니게 협회를 떠날 수밖에 없었죠. 이때 정부 지원도 끊겨 저희 협회 비용만으로 해외봉사활동을 이어갔습니다. 당시에 제가 2년 만에 정상화를 시켰어요. 교육부 지원도 어렵게 다시 확보했고요.

쉼 없이 달려온 삶, 마지막까지 봉사할 것

- PAS의 향후 비전을 어떻게 보고 계시는지요.

김상철 창립 이사장이 처음 PAS를 추진한 것은 위대한 일로 평가 받아야 합니다. 최근 정부도 아시아 국가 간 적대감을 버리고 우호관계를 회복하는 정책에 주목하고 있잖아요. 해외봉사도 유행처럼 번지고 있고요.

그런 맥락에서 PAS를 확대 재생산하는 게 제 꿈입니다. 세계가 자꾸 변화하고 있으니 여기에 좀 더 능동적으로 대처해야 하고요. 그러려면 이 사업에 애정을 갖고 헌신하는 사람이 많아야 하는데 요즘 청년들은 얻는 게 없으면 안 오니 걱정입니다.

- 개인적으로 갖고 계신 향후 계획을 소개해 주시기 바랍니다.

어려서부터 레슬링 국가대표 선수에, 코치에, 한국체대라는 국립대학 교수와 총장까지 반평생을 체육과 함께 보냈습니다. 그렇게 하다 고 김상철 창립 이사장을 만나고 보수운동가로서 사회운동을 시작했어요. PAS 뿐만 아니라 김상철 이사장과 20년 가까이 함께 하면서 한미우호협회, 탈북난민구호운동본부 사업에도 참여했어요. 그 분이 워낙 많은 일을 하시는 분이라서요.

항상 내가 뭔가 해야 한다는 의무감 같은 게 있었는데 저도 이제 70대이니 인생을 마무리 지을 때입니다. 이 PAS를 통해 봉사할 수 있다는 게 행복합니다. PAS와 청년해외봉사단을 내실 있게 만들고 다음 사람에게 넘겨줄 생각입니다.

인터뷰 /정재욱 기자 jujung19@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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