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성 파괴의 실험장 베를린 슈타지 감옥
인간성 파괴의 실험장 베를린 슈타지 감옥
  • 미래한국
  • 승인 2014.01.03 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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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획] 통일 독일 현장을 가다②
 

과거 동독을 통치하던 집권 세력은 공산당(SED)이었지만 이들의 독재가 가능했던 것은 정보기관 슈타지(Stasi) 때문이었다는 말이 있다.

비밀 정보원까지 거의 20만 명에 육박하는 슈타지 요원들이 1600만 명의 동독 주민들을 철저히 감시하고 처벌함으로써 감히 일탈 행위를 못하도록 한 것이다. 통일 이후 발견된 슈타지 문서를 통해 주변 지인들이 자신을 감시했던 비밀 요원으로 밝혀진 사례도 숱하게 많을 정도다.

독일의 주요 도시들을 찾은 이번 출장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일정도 베를린 외곽에 있는 동독 출신들에겐 통일이 된 지 23년이 지난 지금도 두려움의 대상인 호엔쉔하우젠이라는 이름의 슈타지 감옥이었다.

과거에는 지도에도 없던 건물. 많은 정치범들이 박해를 받고 생명까지 잃은 악명 높은 곳이지만 지금은 여기저기 외국인 관광객들로 북적인다. 베를린 장벽이나 슈타지 본부처럼 독일은 과거 독재의 잔재들을 그대로 남긴 채 반(反) 독재, 반 공산주의 교육에 활용하고 있다.

 

동독인에겐 여전히 두려움의 대상

이 슈타지 감옥은 처음에는 나치의 시설물로 지어져 소련군에 의해 1945년부터 감옥으로 사용됐다고 한다. 그리고 1951년 탄생한 슈타지가 이곳을 조사기관 겸 감옥으로 이용했다. 슈타지는 동독 전역에 17개의 감옥을 운영했는데 이곳은 베를린에 있는 3개 감옥 가운데 하나다.

이날 방문에선 두 명의 실제 피해자들을 안내인으로 만날 수 있었다. 이곳과 체코 인근 감옥에서 3년 6개월 동안 수감생활을 한 에다 셴헤르츠라는 여성은 “엄마가 어디로 갔는지도 모르는 아이들과 3년 넘게 만나지도, 안부를 전하지도 못한 게 가장 힘들었다”고 토로했다. 동독의 TV 언론인 출신인 셴헤르츠 씨는 정부에서 요구하는 정치 방송을 거부하고 서독으로 탈출하려 했다는 이유로 체포됐다.

그녀는 “조사한다고 끌고 가서 계속 감금했다”며 “말로는 조사지만 실질적으로는 정치범으로서 수용해 놓은 것이었다”고 증언했다. 그녀는 이렇게 고초를 겪고 출감한 몇 년 후 서독이 동독에 재정 지원을 하고 정치범을 데려오는 일명 ‘프라이카우프’ 정책으로 서독 땅을 밟게 된다.

셴헤르츠 씨가 처음 안내한 곳은 일명 U-보트(1,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이 운용했던 잠수함을 말한다)로 불리는 지하 감옥이다. 감방이나 복도에 항상 물이 고여 있고 감방 문에는 창이 없어서 내부가 칠흙 같이 어둡다고 해서 그렇게 불렀다. 베를린 지역에 원래 지하수가 풍부했다고 하니 자연 상태를 정치범 관리에 그대로 활용한 셈이다. 4~8명이 사용하는 감방에는 나무로 만든 침상이 있지만 낮에는 절대로 앉거나 누울 수 없었다.

고문과 질병으로 악명 높은 지하감옥 ‘U-보트’

셴헤르츠 씨와 함께 슈타지 감옥 설명을 도운 브라이트 바트 씨는 “지하감옥 시절에는 물리적인 고문이 많았고, 질병으로 죽는 사람도 다수였다”고 증언했다.

주로 물고문이 많았는데 한 겨울에 물을 퍼 붓고 젖은 옷을 입은 채 그대로 놔두거나 뒷목 부분에 물방울을 일정하게 떨어뜨리는 식이다. 그리고 장티푸스나 결핵, 수인성 전염병에 걸려 사망하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이렇게 고문과 질병으로 죽은 사망자 수가 3000명이 넘는다는 게 바트 씨의 증언이다.

 

이 지하감옥은 1961년까지 운영되다 폐쇄되고 바로 옆 지상에 신축 건물로 수용자들을 옮겼는데 이유는 동독이 국제사회의 인권 개선 압력에 겉으로라도 굴복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바트 씨는 이와 더불어 가혹행위를 권장했던 스탈린이 사망한 것도 큰 이유라고 전했다.

여하튼 정치범들을 지상동으로 옮기면서 그들을 다루는 방식도 물리적 고통에서 좀 더 치밀하고 집요한 심리 파괴 전술로 바뀌었다. 지하감옥이 인간의 물리적 생명을 위협하는 시설이었다면 지상감옥은 인격 자체를 말살하는 것이 목표인 것이니 실상이 참담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여기선 차에서 내려 감옥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입실, 이동, 조사까지 모든 수형 관리를 체계적으로 관리했다. 예컨대 체포한 정치범을 눈을 가린 채 외부와 단절된 특수 개조된 차량으로 끌고오는 것부터 시작해서 차에서 내려 옷을 다 벗긴 채 복도에 서게 하고 신입이 들어올 땐 각 감방의 문을 차단해 아무와도 마주치지 않게 하는 식이다.

특히 지상감옥의 핵심은 처음 끌려온 모든 정치범이 거쳐야 하는 블랙박스로 불리는 독방이다. 이 감방은 창문 하나 없이 둥글게 만든 내부 벽을 검정색 고무로 만들어 깜깜해서 어두울 뿐만 아니라 누구와도 소통할 수 없다. 벽을 둥글게 만든 것은 공간을 파악하지 못하게 해서 인간을 미치기 직전의 상황으로 몰아가기 위함이라고 한다. 게다가 벽이 고무로 만들어져서 자살을 할 수도 없다.

바트 씨는 “이 블랙박스 고무 방에 들어오면 처음에는 소리를 지르고 울다가 나중에는 상상으로 머릿속에 그림을 만들면서 서서히 미치기 시작한다”며 “여기가 바로 인간의 정신을 파괴하는 장소”라고 강조했다. 슈타지 감옥에 들어온 사람들은 여기에 짧게는 하루나 이틀, 길게는 18일까지 있기도 했다고 한다. 사람이 반은 미친 상태가 돼야 이곳에서 나올 수 있다는 말이다.

 

미치기 전엔 나올 수 없는 특수 독방 블랙박스

이곳에 끌려온 사람들이 취조를 받던 조사실은 책상과 의자들이 전부인데 겉으로 보기에는 여느 나라의 그것과 비슷해 보였다. 하지만 여기서도 고도의 심리 파괴가 진행됐다.

조사를 받는 사람의 자세와 조사실의 온도, 조사 시간, 인원, 취조 질문 등이 모두 정교하게 고안돼 인간의 심리를 가장 나약하게 만들도록 매뉴얼화돼 있었다. 이 감옥에 100명이 수감돼 있었는데 조사자만 1인당 4명 씩 해서 400명이었다.

셴헤르츠나 바트 씨도 모두 이 지상감옥을 거친 피해자들이다. 셴헤르츠 씨는 언론인으로서 수감됐고 바트 씨는 수감 당시 결혼 2개월 차의 평범한 23세 청년이었다. 죄목은 간단했다. 1976년 동독의 반체제 가수인 볼프 비어만에게 내려진 당국의 입국 금지 조치에 반대하는 전단을 만들어 건물 벽에 붙인 게 이유였다.

그렇게 해서 1년 8개월 동안 수감돼 고초를 겪었다. 그를 밀고한 것은 슈타지의 비밀 정보원이었던 그의 친구였으니 동독의 현실에 대해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바트 씨는 “부인이 임신 중에 갑자기 잡혀 온 사실이 가장 힘들었다”고 회고했다.

이들이 증언하는 1970년대 슈타지 감옥, 그리고 그들도 겪어보지 못했다는 1950년대 슈타지 지하감옥. 여기선 이미 과거의 일이다. 통일 23년이 지난 독일은 이제 과거 독재에 대한 사법처리를 마무리하고 지금은 국민 통합을 위해 한창 노력 중이다.

1957년부터 독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질 때까지 슈타지 전체의 수장이었던 에리히 밀케가 통일 이후 체포돼 아이러니하게도 이곳에 수감됐다는 사실도, 이제는 지나간 전설 같은 이야기일 뿐이다.

 

평범한 주부와 남성이 수용소로 간 이유

정작 여기 슈타지 감옥 피해자들이 걱정하는 곳은 따로 있었다. 바트 씨는 “북한 정권은 지금도 과거의 동독보다 더 심각한 인권 탄압을 자행한다고 들었다”며 “내 경험을 비춰볼 때 인간 개개인에 대한 상처가 극복되기 위해서는 몇 세대가 지나야 그런 트라우마가 해결될 수 있다”고 걱정했다.

북한 국경 부근 보위부에서 조사를 받은 경험이 있는 탈북민은 이렇게 증언한다. “동독에서 1950년대 자행된 갖은 고문과 폭력이 북한에선 지금도 비일비재한 게 북한 수용소의 현실이고 인간성을 파괴하는 취조 방식 또한 북한의 체제가 더 철저합니다. 국제사회가 동독의 인권을 개선한 것처럼 북한에도 꾸준히 압력을 가해야 합니다.”

베를린 호엔쉔하우젠 슈타지 감옥= 정재욱 기자 jujung19@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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