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경제와 기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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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래한국
  • 승인 2014.02.12 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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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를 보는 눈] 이종윤 상임고문‧한국기독교학술원장


창조경제란 무엇인가? 모방경제가 아닌 새로운 시장 개척, 경쟁이 포화상태에 이른 레드오션이 아닌 블루오션에 눈을 돌리자는 것인가?

창의성이 바탕이 돼 생각의 한계선이 없는 창조적 아이디어가 이끄는 경제 구조를 말하는 것인가?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밝고 어두운 면이 있다. 창조적 지혜를 회복한 이와 옛사람 그대로 경제를 논하는 것에는 분명히 명암(明暗)이 엇갈릴 것이다.

창조냐 진화냐?

이 질문은 새삼스러운 질문이 아니다. 본래 기독교 신앙은 창조주와 피조물의 구별로부터 시작된다. 창조주는 자율적 존재고 인간을 포함한 모든 피조물들은 타율적 존재다. 창조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바라(barah)라고 읽는데 이것은 무(nihil)에서 유(有)를 만드는 것을 말한다.

영어로 create인데 이는 유(有)에서 유(有)를 만드는 make와는 구별한다. 하나님은 천지만물 모든 것을 그 종류대로 만드시고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시면서 종류대로 생육하고 번성하라 하심으로 창조를 하셨다. 파충류나 원숭이 종(種)이 사람으로 진화된 것이 아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권능과 목적과 계획을 가지시고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것이 성경의 주장이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들은 하나님의 완전하신 지혜를 나타낸다. 따라서 하나님은 모든 생명의 저자가 되시며 동시에 그 운명을 지배하신다. 하나님은 사람을 지으실 때 다른 피조물과 달리 하나님의 형상(Imago Dei)대로 창조하셨다.

부패, 기형성, 상실

인간의 지식과 의와 거룩성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것이다. 그러나 어거스틴는 인류 최초의 시조인 아담이 범죄했을 때 초자연적 은사들은 사라져 버렸고 자연적 은사는 부패됐다고 한다. 요한 칼빈은 인간의 본성이 타락될 때 부패와 기형성이 나타났다고 한다.

그래서 칼빈은 타락한 인간에게 하나님의 형상이 전적으로 멸절되고 파괴된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아주 부패돼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놀랄 정도의 기괴함뿐이라고 말한다. 또한 아주 오염돼 거의 뿌리 뽑혀져 혼동되고 손상되고 병으로 가득찬 것 외에는 파괴된 것에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빈은 ‘이전 상태의 사람에게 하나님의 형상이 조금도 나타나지 않는다’고 말하지는 않았다. 이런 타락한 상태에 있는 인간도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부르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의 긍휼을 받을 수 없지만 그들 안에 새겨진 하나님의 형상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해를 당할 때 그들의 인격 안에서 자기 자신이 해를 당하신 것으로 여기신다.

하나님 형상의 회복과 창조적 경제인

사람을 불쌍히 여기신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속주로 보내셔서 죄인된 인간을 대신해 대속의 죽음을 죽게 하심으로 그를 믿고 그 안에 있는 이들의 잃어버린 하나님 형상을 회복시켜 주셨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은혜로 얻은 칭의와 성화가 일그러지고 거의 말살된 하나님의 형상을 우리 안에 회복시켰다고 믿는다.

그리스도께서 가장 온전하신 하나님의 형상으로 계시되었기 때문에 경제인들이 그 형상에 일치하게 될 때 의와 순결과 지성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케 된다.

거기서부터 창조적 인재가 배양되고, 창조성의 교육과 창조적 산업이 육성되므로 창조경제의 이상은 실현될 수 있을 것이다. 거듭난 인간됨이 없는 경제활동은 칼을 쓸 줄 모르는 어린아이의 손에 예리한 칼을 쥐어준 것 같이 위험할 뿐이다.

이종윤 상임고문
한국기독교학술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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