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 최고의 농경 역사를 가진 한국인
동아시아 최고의 농경 역사를 가진 한국인
  • 한정석 편집위원
  • 승인 2015.03.02 15:4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강원도 고성의 5천 년 전 밭 경작지 발굴이 의미하는 것
 

한중 FTA로 우리 농촌의 시름이 깊어지고 있다. 거대한 대륙 중국에서 생산되는 어마어마한 농작물이 싼 가격에 우리 식탁에 오르게 되면 한국 농업은 고사(枯死)를 피할 수 없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꼭 그렇게 걱정만 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우리 한국인의 문화·역사 DNA는 이미 농업에 관한 한, 중국과 일본보다 더 오래되고 첨단화된 자생적 질서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2012년 6월 강원도 고성에서 발굴된 5000년 전 신석기시대 밭 경작 유적은 한국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농경사를 새로 써야 할 만큼 중요한 사건이었다. 이제까지 한국의 농경문화는 신석기시대가 아니라 청동기시대로 인식돼 왔다.

가끔 보습이나 쟁기 같은 유물이 발굴되기도 했지만 이는 농경이 아니라 수렵 채취 과정에서 채취용이었을 거라는 학계의 의견이 우세했다. 하지만 강원도 고성 문암리의 선사유적은 그러한 학계의 인식을 송두리째 바꿔놓은 쾌거였다.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가 지난 2010년부터 발굴을 시작한 강원도 고성 문암리 선사유적지에서 신석기시대 중기(기원전 3600~3000년)의 집 자리 5기와 야외 노지 13기 등의 유구와 함께 2개 층의 밭이 확인됐던 것이다. 이러한 유적은 일찍이 중국과 일본에서도 등장하지 않는 것이었기에 학계의 놀라움도 그 만큼 컸다.

아직 이 경작자들이 누구인지, 무엇을 재배했는지, 그들이 어디서 왔는지에 대한 연구는 더 필요한 상황이다. 하지만 고성 유적지에서 발굴된 신석기시대 토기 파편들을 방사성측정법으로 추정한 연대는 한국 신석기시대의 최고(最古)라는 5000년 전 오산리 유적에 필적하거나 조금 앞서는 것이었다.

문화재청의 학예연구사들은 이 고성 문암리 유적의 토기들이 동북3성과 러시아 연해주와 일정한 관계 속에 놓여 있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한반도에서 발견된 농경의 역사

동해안 가까이에 위치한 고성의 밭 경작 유적이 연해주 신석기시대의 문화와 연계가 있다면 이는 다시 저 제주도 고산리와 일본 죠몬문화와 묶이는 아무르 커넥션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연해주 아무르강 유역의 시치카-알린에서 발굴된 유적들은 1만3000년 전의 시기를 기록한다. 죠몬문화의 가장 이른 시기의 토기가 1만2000년 전을 기록하고 제주 고산리의 토기 역시 1만 년 전을 다투고 있다.

이로부터 학계는 아무르강 연해주 지역의 선사인들이 한반도를 거쳐 제주에 이르렀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대개 이 시기의 주 식량원은 농업이 아니라 수렵 채취와 함께 강과 해안에서 행해진 어로였다는 것에 많은 학자들이 동의하고 있다.

그렇기에 시베리아 선사고고학을 연구한 젊은 학자 강인욱 교수는 동아시아 특히 시베리아 영향권의 신석기 문명은 농업이 아니라 어로를 통해 시작됐고 이를 메소포타미아의 농업혁명에 비교해 ‘어로의 길’이라고 명명하기도 했다. 그것은 오늘날 조심스럽게 ‘환동해선사문화권’을 가정하게 만든다.

동해를 중심으로 러시아 연해주-강원도-제주도-일본(죠몬)의 선사고대 문명권이 존재했을 가능성이다. 이 문화의 주인공들은 오늘날 고(古) 아시아인이라 불리는 길략(gilyak)족이나 추크치들이며 여기에는 오늘날 아이누라고 불리는 이들도 포함된다.

흥미로운 것은 김방한이나 강길운 교수 등 권위 있는 언어학자들이 한민족의 기층 언어로 ‘길략어’를 지목했다는 점이다. 그러한 배경에는 길략어의 저명한 권위자인 끄레이노비치가 있었다.

   
 

그는 현재 아무르 강구와 사할린 일부에 살고 있는 고아시아인인 길략인의 언어계통을 비교 조사하는 과정에서 한국어와 일치하는 어휘들을 확인했다.

고아시아인들이 한때 남쪽에서 한반도인들과 밀접한 접촉이 있었다는 정황은 바로 환동해선사문화권의 존재에 새로운 빛을 던져 주게 된다.

그런 점에서 강원도 고성의 5000년 전 밭 유적의 주인공들은 남쪽으로 한반도에 정착했던 이 고아시아계통의 사람들과 모종의 관계 속에 놓였을 수 있다.

문제는 길략인들과 같은 고아시아인들은 수렵이나 어로가 주 생산양식이었다는 점에서 이곳의 선주민들의 밭농사가 그들에게 농경을 전수했을 가능성도 높다는 점이다.

5000년 전 고성의 밭 유적과 토기편들이 아무르 유역의 선사문화와 연계성에 있다는 점은 한국문화의 원형에 여러 모로 시사하는 바가 크다.

동아시아에서 가장 이른 농경의 시작이 1만 년 전 양자강 유역의 쌀농사라는 점이 탄화미로 밝혀지면서도 그 일대에 밭 유적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은 이상하다.

반면 한반도에서는 소로리에서 1만3000년 전 재배초기의 탄화미가 발견됐고 그 저층에서 벼과 식물에 서식하는 곤충들의 화석도 발견된다.


신화의 상징으로 본 반농반어 생활

아울러 동아시아 최초의 밭 유적도 발굴이 됐다. 미 오렌곤대학의 고고학팀은 충주호 주변 탐사에서 4000년 전 탄화된 대두(大豆)를 발굴했으며 그것이 역사상 가장 이른 재배종이었음을 확인해 보고하기도 했다.

다시 말해 한반도에서 발견되는 농경의 역사가 중국이나 일본보다 이전 시기라는 점은 동아시아의 농경문화 출현과 그 기원에 대해 만만치 않은 숙제를 남기고 있다.

이러한 숙제들을 해결할 실마리는 없을까. 우리는 한국의 전래 신화 속에서 아주 희미한 힌트를 발견할 수 있다. 강원도 고성의 밭 경작은 한반도에서 어로와 함께 경작이 시작되는 반농반어의 출현을 의미하는 것일 수 있다.

   
▲ 고아시아족의 일원인 야쿠트족

그런 전제로 보자면 한국인들의 깊은 무의식 속에는 어로의 용왕신이 먼저 있었고 농경이 시작되면서 토백(土魄)이라는 지신(地神)의 관념이 형성된 이후 만주와 시베리아에서 이주한 청동기 문화집단의 천신(天神) 관념이 형성됐다는 점도 이해된다. 이로부터 흥미로운 가설을 하나 생각해 보기로 하자.

고조선의 신화는 환웅이라는 청동기 문화의 천신과 웅녀라는 지신의 결합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런데 부여의 시조 동명왕과 고구려의 시조 주몽은 수신(水神)인 하백의 딸과 천신이 결합하는 구조다.

고구려 시조 주몽신화가 그 출자국인 부여의 동명신화의 리바이벌이라는 점은 잘 알려져 있으므로 우리는 부여의 초기 모습이 농경이 아니라 어로형태였고 이에 청동기 문화의 주인공들과 어로중심의 부여 토착인들 간에 결합이 이뤄지는 모습을 그려보게 된다.

그러한 어로문화의 북방족은 난나이나 길략 같은 아무르 강변의 고아시아 족속들이고, 이들에게는 곰 숭배 신앙이 발달돼 있었다. 고구려가 부여의 별종(別種)이라는 중국사서의 기록은 농사를 짓는 ‘숙여진’과 사냥을 하는 ‘생여진’의 두 갈래처럼 부여에도 농경과 어로의 두 집단이 혼재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고구려가 소수(小水)라 불렸던 압록강 지류에서 생활하는 맥족, 즉 ‘소수맥’을 건국 집단으로 했다는 기록은 고구려의 초기 문화가 어로와도 관계있음을 암시한다고 볼 수 있다.

제주도는 아예 천신과 지신이 배제되고 땅에서 솟아난 삼성혈의 지신들이 단독으로 등장한다. 제주도의 선사 문화는 아무래도 농경보다는 어로에 의존한 것이었겠으나 지신 신앙이 단독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제주 문화의 원초성이 농경문화에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다시 말해 제주도가 오늘날 섬이 된 것은 대략 8000년 전 즈음이며 소로리에서 탄화미가 발견되던 1만3000년 전의 제주도 주변은 바다가 아니라 드넓은 평야지대였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1만2000년 전 전세계적으로 일어난 간빙기로 인해 황해 해수면이 상승하면서 중국 동부, 한반도 남부와 서해안으로 이동한 이들은 각각 그 지역에서 농경을 행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한 농경이 내륙으로 전파되면서 강원도 고성의 5000년 전 밭이 등장했다는 설명에는 무리가 없다.

 

한정석 편집위원·전 KBS PD

본 기사는 시사주간지 <미래한국>의 고유 콘텐츠입니다.
외부게재시 개인은 출처와 링크를 밝혀주시고, 언론사는 전문게재의 경우 본사와 협의 바랍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